틈새로 비추어 들어오는 햇빛이 마치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으나 구원 따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단되어 피가 줄줄 흐르는 다리를 질질 이끌고 걸어가자 바닥에 붉은 물감을 바른 붓으로 칠하듯 붉은 선이 죽죽 그어진다. 그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과다출혈로 죽거나, 그것이 아니면 그들의 밥이 되어버리겠지. 물론 남자는 전자의 상황을 바라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물린 이상 그도 그것들의 동료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 남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져 유성 매직을 꺼내 들었다. 자신의 눈에 보인 것은 슈퍼마켓의 정문이었으며, 특이하게도 문고리에는 "CLOSED" 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남자는 안내판의 "CLOSED" 아래에 글자를 적어넣기 시작했다.
"이곳은 출입 제한 구역입니다." 그 글을 써넣은 그는 안내판을 돌리려 하였는데, 그 순간 뒤에서 들린 비명인지, 아우성인지 모를 놈들의 목소리에 마음이 급해져 그만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손에 들고 있던 유성 매직을 떨어뜨리자 매직의 강한 냄새를 맡은 듯,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그르릉. 하며 울기도 하였고 이따금 사람의 말도 하는 것 같았으나 대부분 비명소리와 같은 소리였다. 그것들의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남자는 메마른 침을 삼키고는 뒤를 돌아본다. 그것들이 눈을 밝히며 그를 내려다봤다. 이윽고 거대한 아가리를 벌려 그에게 다가간 뒤.
으적
*
철수는 단말기를 빤히 노려다 보며 다른 손으로는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분명 춥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두껍게 입고 왔는데 춥기는커녕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 이제 겨우 3월인데 여름처럼 느껴지는 날씨였다. 철수는 지구 온난화가 문제라며 중얼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중얼거리는 것은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처럼 혼잣말이 무척이나 많은 성격의 남자였다. 물론 주변에 누군가 있다면 입을 다물지만 말이다. 철수는 여전히 혼자서 무언가 중얼거리며 같은 동아리의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터리 연구부"라는 비공식 동아리의 부회장이었던 그는, 회장의 부재로 인하여 이 탐험에 참가하게 되었다. 마침 집에서 어머니의 잔소리가 심해질 때였던 터라, 철수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이번 탐험에 대하여 회장인 다영에게 묻자 다영은 짧게 "폐쇄 마켓"이라고 대답했다. 정확한 정보와 증거는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동네의 큰 슈퍼마켓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 이사 온 지 6개월밖에 안 된 철수는 알 리가 없었다. 그 일은 2년 전에 일어났다고 했으니. 그 이야기는 철수의 흥미를 끌었다. 미스터리에 열광하는 철수였다. 다영은 눈을 반짝이며 자기도 가고 싶다는 철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아무런 답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다영에게 문자가 왔다. 자신은 남자친구와 약속이 있어 탐험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회장의 빈자리를 부회장이 채우라는 말도 덧붙였다. 철수는 제자리에서 방방 뛴 뒤 옷을 챙겨입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 철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진우와 대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미래와 민주도 도착했다. 철수는 다영이 안 오는 이유를 설명했다. 다들 이해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는 그런 아이들의 태도가 좋았다. 남을 이해해주는 그 모습이. 이 아이들은 배려할 줄 아는구나. 이렇게 좋은 아이들과 같은 부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철수는 친구들과 함께 폐쇄 마켓으로 걸어갔다.
이 거대한 슈퍼마켓은 문이 쇠사슬로 묶여 들어갈 수 없어 보였으나, 묶어도 너무 느슨하게 묶여 있어서 최대한으로 밀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또, "OPEN"이라는 안내판을 보자 아이들은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문을 밀어 틈을 벌리고 하나하나 들어간다. 마켓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다른 이들의 눈을 신경 쓸 일도 없었다. 맨 처음으로 진우가, 진우의 뒤를 따라 미래와 민주가 들어갔다. 대윤이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철수가 낑낑거리며 마켓에 들어갔다. 역한 냄새가 훅 끼쳤으며 어두워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섯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묘한 흥분상태가 되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하고 있으리라. 미스터리 동아리의 일원들로써 이런 분위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간도 시간이니 한 바퀴만 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어때?"
대윤이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며 말했다. 철수는 대윤의 준비성에 감탄하며 답했다.
"음.. 글쎄. 너희 의견은?"
철수가 묻자 미래와 민주가 입을 모아 답했다.
"찬성~!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해준다고 했거든!"
"나도 찬성. 밤에는 조금 춥기도 해서."
철수는 진우의 의견도 듣고 싶다는 듯이 진우를 바라봤으나, 진우는 멍하니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철수가 진우에게로 걸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안내판을 가리켰다. "CLOSED"라는 글자 아래에 "이곳은 출입 제한 구역입니다." 라는 글이 적혀져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왕 온 길을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진우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다가 철수를 바라봤다. "나가고 싶다." 라는 마음이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철수는 하는 수 없이 진우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밀어줬다. 엉금엉금 기어 나온 진우는 부랴부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가 웃었지만, 그 웃음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자.. 그, 그럼. 가자."
미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넷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대윤은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췄는데, 이윽고 무언가 발견한 듯이 눈을 밝히며 걸어간다. 철수는 그런 대윤의 뒤를 따랐다. 미래와 민주도 따라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윤의 얼굴은 창백해졌는데, 철수가 조심스레 무슨 일이냐고 묻자 대윤은 말없이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췄다. 붉은색 피가 말라 굳어있었다. 철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미래와 민주에게 나가자고 말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철수는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대윤이 들고 온 손전등은 깜빡거리더니 이내 꺼졌다. 대윤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이제 바깥도 어두워져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철수는 대윤에게 천천히 팔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았다. 대윤은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강은 예상할 수 있었다. 옆쪽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미래와 민주이리라. 철수는 대윤의 손을 잡고 자신이 걸어온 기억을 더듬으며 문을 찾았다.
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이 느껴진다. 철수는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디뎠다.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걸었다. 벽은 차가웠으며, 이상한 느낌 또한 들었다. 벽 쪽에서 구린내가 난다. 철수는 고개를 돌렸다.
*
다영은 남자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둥근 달이 떴다. 보름달이다. 다영은 그 달을 보고 잠깐 예전에 전해져 내렸던 전설이 생각났다. 죄인들을 가두고 실험을 하는 이상한 연구 기관이 이 마을에 있었다는 단편적인 도시 전설이었다. "인류 진화 프로젝트"라는 터무니없는 계획이라고 어른들에게 들었다. 죄인들에게 이상한 약물을 주입해 새로운 신인류로 만든다. 결과는, 뜻밖에도 성공적이었다. 박사들은 기뻐했으나, 죄인들은 뛰어난 신체능력을 얻었고 또한 막을 수 없는 흉포함과 분노를 얻었다. 연구 기관은 무너졌고 그 부지에 슈퍼마켓이 생긴 후, 신인류는 시멘트에 파묻혔다고 한다. 그저 하나의 괴담. 그것으로 끝이리라. 다영은 즐거운 탐험을 하고 집에 돌아갔을 동아리 회원들을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이윽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녀를 부르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며.
*
알아서는 안 된다. 철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쪽에서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시하자. 철수의 본능이 그렇게 비명 지르고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딛는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다급해진 철수는 대윤이 있었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마켓 깊은 쪽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그 비명이 너무나 애매해서 괴성으로 들리기도 하였다. 철수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문으로 달려가 문을 쾅쾅 두드린다. 문을 두드릴 때마다 쿵쿵 발소리도 커져 온다. 분명 이곳에 뭔가가 있다.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가.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지른다. 철수는 정신을 차려 문을 밀었다. 우선 여자아이들을 나가게 하고 자신도 나가면 될 터였다. 미래와 민주를 내보낸 뒤, 철수도 마켓에서 나왔다. 살았다. 그렇게 생각할 때, 대윤이 떠올랐다. 아차, 하는 순간 마켓 안쪽에서 빛이 나왔다. 그 빛은 점점 커져 문쪽으로 다가왔다. 미래와 민주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철수만이 그 자리에 서서 그 빛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 그것은 눈이었다. 광기와 공복, 분노와 악의가 가득 담긴 붉은 눈동자였다. 쾅쾅. 하며 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도망쳐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마켓 안에 있을 대윤이 생각나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마켓에선 또 다른 빛이 생겨났는데, 그 붉은빛은 이곳저곳 번져갔다. 철수는 그것이 무엇인지 멍하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놀랄 힘도 없었다. 불. 그것은 불이었다. 불이 번져가고 있었다. 저 불이라면 괴물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온기를 느낀 듯이, 괴물은 몸을 돌려 불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마켓 옆 골목길에서 누군가 달려나왔다. 진우였다. 진우는 철수의 손을 잡고 뛰었다. 그 작은 몸에서 이런 힘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달린 진우는 숨을 헐떡였다. 철수는 진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집으로 돌아갔다. 대윤이 무사히 탈출하길 빌며.
*
틈새로 들어오는 달빛이 이곳에 남은 것은 절망뿐이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느끼게 하였다. 대윤은 화상을 입은 몸을 이끌며, 죽을 땐 죽더라도 이것 만은 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문의 안내판을 바라봤다. "이곳은 출입 제한 구역입니다." 대윤은 글자를 조용히 읽으며 손을 뻗었다. 큰 손이 대윤의 손을 잡은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대윤은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것의 눈동자는 광기와 공복, 분노와 악의가 가득 차있는 붉은색이었다. 그것은 야만적인 아가리를 벌려, 대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찰나 그것의 눈동자에 해방감이 깃든 것을, 대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알아냈다. 이 괴담의 모든 내용을. 대윤은 이제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인간이 아닌. 괴물로서. 한 때는 신인류라 추앙받았으나, 괴물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그들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대윤은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대윤은 눈을 감았다. 아가리는 다가와 차가운 한기를 내뿜으며 대윤의 머리를.
으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