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icRoom (118)

본론부터 말하자면 예전 글을 모아두고 잠궈두고 있던 패닉룸을 공개로 바꿔뒀어요.

사실은 글을 쓰면서도 내내 내가 쓰는 글을 누군가 읽기는 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고, 좋아하는 걸 쓰면서도 종종 미숙한 글이 부끄러웠던 시절이 많아요. 지금도 그렇게 큰 건 아니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는 기분전환의 일종으로 지금까지 써둔 글을 전부 지워버리는 것으로 기분전환을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지워버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비공개로 해두었던 것을... 다시 공개해두기로 했습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정돈되지 않은 글들이 가득해요. 언젠가 다시 먼지를 털고 다시 쓸 수 있을 기회가 있다면 좋겠네요.

종종 방문해주시는 분들은 어떤 경위가 되었더라도 항상 감사합니다. 방명록에 남겨주시는 인사는 늦게나마 읽고 있어요. 덕분에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날이 참 덥고 습하네요. 무더운 여름 어렵거나 힘들게 지내지 마시고 가능한 한 편하고 즐겁게 지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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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9(아이나인)은 서버시간으로 오전 일곱 시 정각에 눈을 뜬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닿는 발로부터 느껴지는 온도며 감촉, 모든 것이 평균값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오늘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예측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누워있던 잠자리를 정돈한 뒤 세척이 필요한 부위에 적합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방을 나선다. 흰 복도에 부딪히는 발의 소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고, 이따금 복도에서 마주치는 동료들은 “좋은 아침, I-9.”하고 똑같은 높낮이로 인사를 건넨다. 그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으며, 자신이 들어가야 할 방의 문 앞에 서면 자동으로 열리는 흰 문 너머로 펼쳐진 적막과 검정을 응시하다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는다. 날짜를 세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오늘로 18년 하고도 6개월에, 추가로 17일. 언제나 그렇듯이 똑같고 평균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패널을 바라보고 공간을 계산한 뒤 콘솔을 조작하여 용도에 맞는 건물을 배치한다. 하나의 구역을 완성하면 그것을 출력하여 벽에 걸어두고 동료들에게 송신한 다음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수정을 가한 뒤 모두의 오케이 사인을 받아내면 건설을 맡는 팀으로 출력된 청사진을 보낸 뒤 파일도 함께 송신한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면 그는 리스트에 올라온 다음 장소의 지면도를 그린 패널을 바라보고 공간을 계산한 뒤 콘솔을 조작하여 용도에 맞는 건물을 배치한다. I-9에게 이 일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으며, 일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계산을 해야 했으나 피곤하다고는 느껴지지 않았고, 반복된 작업에 따르는 지루함조차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은 물론 자신이 배치한 건물들의 구조가 완벽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으며, 그로 인해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믿었고 계산의 결과가 그를 뒷받침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계산을 통하여 그가 내놓는 건물 배치는 언제나 옳았으며 동료들 또한 그에 동의하였다.

 그의 하루 역할 행동은 오전 일곱 시 반부터 시작하여 정오-오후 한 시의 휴식시간을 포함하고 오후 다섯 시 삼십분까지 진행되는데, 그 이후 그의 일과란 적당한 문서를 찾아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거나 건설 팀에 연락을 보내 지금까지 작업 과정이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는지 묻는 것 등이다. 이러한 일과가 모두 끝이 나면 늦어도 열 시.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침구에 몸을 눕히고 수면을 취한다.


 현재 시간은 서버시간으로 오후 여덟시 삼십분이었고, I-9은 정해진 순서대로 연락을 보내 건설의 진행 정도가 어디까지 되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현재 ZZ-15지구의 건설 과정이 끝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그는 조만간 AAA-1지구 건물 배치도를 작성하게 될 것이라 예측한 뒤 연결을 끊는다. 남은 시간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발한 물질들에 대해 다룬 문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데이터화 되지 않은 문서를 읽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과정이긴 하였으나 그는 이러한 과정 또한 그에게 주어진 “삶”으로서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손을 뻗어 탁상에 펼쳐진 문서를 집어 든다. 제목이 적힌 페이지를 넘기려는 순간 그의 방은 물론이고 복도 전체에 방송이 울려 펴졌다.


 “I-9, I-9은 대책 회의실로 오세요. 다시 말합니다. I-9, I-9은 대책 회의실로 오세요. 이상.”


 첫 번째 방송이 끝나는 순간 그는 이미 복도를 걷고 있었다. 텅 빈 복도를 걷는 발소리는 방송 내용에 묻혀 들리지 않았으나, 단어와 단어 사이 통, 통,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I-9은 헐떡이지도 심장이 뛰지도 않았으나 자신에게 그런 기관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며 대책 회의실의 문 앞에 선다. 발바닥 밑에 있는 인식 패널이 그를 확인한 뒤 회의실의 문이 열리면, 그 너머에는 고민하고 있는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중앙에 앉아 그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낯선 이를 본다.


 “시간여행이란 말인가요?”

 I-9은 여행자에게 물었다. 여행자는 익숙한 질문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요. 믿기지 않는다는 거, 하지만….”

 “아니요. 믿습니다.” I-9은 여행자의 말을 끊는 미안함보다는 사소한 오해를 정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말을 뱉었다. 여행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자는 눈을 한 바퀴 돌렸고, 킁, 하며 코로 공기를 한 번 급하게 빨아들인 뒤 제 인중을 검지와 중지로 문질렀다. 그는 이어서 입술을 쫙 벌려 위쪽 이빨과 아래쪽 이빨이 딱 붙은 채인 치열을 드러냈고, 이어서 몇 번 그들을 뗐다 붙였다 하며 딱, 딱, 딱. 소리를 냈다.

 “여기에 당신 같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말을 꺼낸 것은 I-9이었다. 여행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I-9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I-9은 그가 어떤 경위를 거쳐 이곳에 왔으며, 또 이곳에 얼마나 있을 작정인지. 돌아가는 방법은 마련해두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질문의 순서를 설정하여 입을 열려는 순간 여행자가 불쑥 말을 뱉었다. I-9은 정리된 질문 목록을 잠깐 내려놓았으며, 이 질문 목록을 다시 집어 들기 전에 해야 할 설명이 많을 것이라고 직감한다. 여행자가 내뱉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요? 운송수단도 마련되어 있겠죠?”

 I-9은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대답을 하려고 했다. 다만 그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찾는 ‘사람들’이 이제는 전부 죽고 사라졌다는 사실과 동시에 여행자가 불시착한 이 시간은 인간의 재생산조차 불가능한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이와 같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상대방이 이해하기 쉬운 순서대로 정렬하는 과정은 최소 1분 정도 걸렸으므로 그 1분 사이의 정적에서 여행자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여행자는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깜빡였고,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거냐는 질문을 또다시 뱉었다. I-9은 받은 질문을 전체적으로 수집하여 문장을 재구성하기 시작하였고 그 사이 “세상이 멸망이라도 한 것이냐” 와 “인간이 멸종한 것은 아니겠지” 라는 내용의 질문을 받았다. 문득 I-9은 설계자인 자신이 이 공간에 있어야 할 게 아니라 상담을 전문적으로 진행하는 동료가 와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여 연락망을 뒤적였으나 검색 결과 떠오른 데이터를 통하여 상담 역할의 동료들은 그 쓰임이 모두 소모되었으므로 각자 자신이 원하는, 혹은 인원이 부족한 영역에 다른 역할 정보를 다운로드 받아 투입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행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미뤄지고, 그동안 여행자는 겁에 질려 뭐라도 말을 해보라고 목소리를 높여댔기 때문에 그에 대처하려던 I-9은 머리가 뜨겁고 눈앞이 시큰해지는 것을 생전 처음으로 느껴본다. 아찔한 기분에 I-9은 흥분한 그에게 손을 펼쳐 보이며 “잠깐!”하고 소리쳤다. 억양이 담겨있는 큰 목소리에 여행자는 순간 기가 죽어 입을 다물었다. I-9은 이 순간, 그 어떤 계산도 필요치 않다고 느끼며 숨을 고른다. 열을 식히고 눈가를 매만진 뒤 여행자를 바라본다.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운송수단은 마련되어있으나 그것은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사용되지요. 어딜 가도 나와 같은 이들만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찾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I-9은 여행자의 텅 빈 눈을 바라본다. 입술의 양 끝은 약간 아래를 향하고 있었고, 빛을 잃은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눈썹의 끝은 아래를 향하고 있어 이것이 의기소침인지 절망감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수용일지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심각하게 오염되었으며, 생물종의 대부분은 버티지 못하고 멸종되었습니다.”

 굳이 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I-9은 이어지는 문장으로 말을 마쳤다.

 “사람들도 물론 멸종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남은 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우리들뿐입니다.”

 여행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I-9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곧 여행자가 물었다.

 “어떻게 세상이 무너졌는지, 아니지. 인간이 멸종했는지 알아요?”

 I-9은 간단한 검색도 거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젓는다. “인간들은 멸종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역사에 그들의 멸종이 남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것이라는 가설만 남아있습니다.” I-9의 답변에 여행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인간이 멸종해도 역사는 남는다?”

 “우리는 남아있는걸요.”

 여행자는 순간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다. I-9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불필요한 것임을 늦게나마 계산하였으나, 뱉은 말을 무르지는 않는다. 어색한 적막과 함께 조용한 긴장감이 흐르는 방 안에서, 이번에는 I-9이 여행자에게 묻는다.

 “시간여행은 어떻게 가능한 건가요? 우린 많은 자료를 찾고 많은 기기들을 복원했지만 시간을 여행하는 기술이나 기계는 찾아낼 수 없었는데요.”

 “아까는 믿는다면서요?” 여행자는 눈을 크게 떠보였다.

 “믿는 것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I-9이 대답했고 여행자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좋게 표현해서 시간여행이지 정확하게는 시간 조난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계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흘러가는 체계가 다르다는 거, 알아요? 보통은 인간 개인의 시간흐름과 세계 시간의 흐름이 비슷하게 동조되어서 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분명 존재하거든요.”

 “그게 당신이란 말인가요?” 장황한 이야기에 I-9은 추가되는 데이터를 정리해가며 들었다. 다 듣고 난 다음 따라붙은 질문에 여행자는 어깨를 으쓱인다.

 “내가 그 중 하나라는 거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몰라요.”

 여행자의 답변에 I-9은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자는 즐거운 듯 말을 잇는다.

 “아무튼, 나 같은 사람들은 내 시간을 세계의 시간에 제대로 동조시키지 못해요. 트러블이 발생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자꾸 튕겨나가는 거야. 그래서 정신을 차려보면 다른 시간대에 놓여있는 거죠.”

 “지금처럼?”

 “지금처럼.”

 여행자의 말에 I-9은 잠시 고민한다. 여행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를 그가 원래 있던 곳에 돌려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시간대에 체류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그가 원래 발을 붙이고 있던 시간대를 기억 할 수도, 그리로 이동 할 수도 없을 테다. I-9은 천천히 제 턱을 매만진다. 어떻게든 대책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를 이 시간대에 마냥 체류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한 편 I-9은 여행자가 개발이 되지 않은 죽음의 폐허가 아닌 이곳에 도착한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그래서 당분간은 여기서 신세를 좀 져야겠어요.”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여행자가 먼저 말했다. I-9은 별 반동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말하며 I-9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편으로는 공간 관리 담당에게 빈 방이 있는지 연락을 보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지도를 열어 이 공간의 구조를 어떻게 하면 간략하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계산했다. 새로 깨어난 동료라면 그저 업로드와 다운로드 만으로 지도를 기관에 이식할 수 있겠지만 이 공간에 불시착한 여행자는 그것이 불가능한 유기체였기 때문에 언어로 된 설명이 필수일 테다. 그렇다면 더 효율적이게 설명하는 편이 옳다. 여행자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르고 있다.


 I-9은 서버시간으로 오전 일곱 시 정각에 눈을 뜬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닿는 발로부터 느껴지는 온도며 감촉, 모든 것이 평균값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오늘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예측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누워있던 잠자리를 정돈한 뒤 세척이 필요한 부위에 적합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방을 나선다. 흰 복도에 부딪히는 발의 소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고, 이따금 복도에서 마주치는 동료들은 “좋은 아침, I-9.”하고 똑같은 높낮이로 인사를 건넨다. 그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으며, 자신이 들어가야 할 방의 문 앞에 서면 자동으로 열리는 흰 문 너머로 펼쳐진 적막과 검정을 응시하다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는다. 날짜를 세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오늘로 18년 하고도 6개월에, 추가로 28일. 언제나 그렇듯이 똑같고 평균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서버시간으로 정오가 되면 뒤편에서 그가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뒤편에서 문이 열린다. 이어서 들리는 발소리는 그에겐 이미 익숙하여 I-9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여행자는 느리게 걸어와 그의 옆에 서서 거의 완성되어가는 설계도에 시선을 둔다.

 “좋은 아침이에요, I-9.”

 “정오입니다.” 여행자가 말하자마자 I-9이 대꾸한다. 여행자는 짧게 웃으며 답한다.

 “열한 번째 대답이지만, 원래 일어나면 그 때가 아침인 법이라고요.”


 여행자는 많은 동료들, 더불어 I-9의 우려와는 달리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였다. 그는 주로 매일 정오에 일어났고 일어나면 그를 전체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된 I-9에게 찾아갔다. 어째서 설계자가 낯선 방문객을 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I-9은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여행자가 그를 가장 익숙하게 대한다는 사실은 자명했기에 반박하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였다. 여행자는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는 미약한 추측이 그의 순응을 도왔다. 더불어 유기체인 여행자가 이곳으로 와서 호흡을 하며 생명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곧 이 공간의 공기가 유기체가 호흡하기에 알맞다는 증명이 되었고, 유기체의 배설물이 식물종의 생장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에 필요한 자료 또한 제공될 수 있게 되었다. 아무쪼록 실보다는 득이 더 되는 일이 더 많았으니 그 누구도 여행자에게 적대감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그것은 I-9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다 할 친애도 없었지만.


 “이런 공간은 어떻게 설계하고 건설한 거예요?”

 어느 날 여행자가 물었다. I-9은 패널에 시선을 둔 채 답을 구상한다. 순차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답을 도출하기까지 걸리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릴 여유는 이미 여행자에게 생긴 지 오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I-9은 설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장을 맺은 뒤 I-9은 패널에서 시선을 거두고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여행자의 눈동자에서 그는 호기심과 불안감을 읽는다.


 “세상이 멸망하였을 때, 대피를 하고 살아남은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그를 ‘발견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발견자는 깊은 지하의 창고에서 우리가 잠들어있는 모습을 발견한 뒤, 빠르게 계산하여 세상을 재건할 계획을 짰습니다.”

 그러는 사이 설계도가 하나 완성되었다. 그는 출력 명령을 내린 뒤 동료들에게 설계도를 송신했다. 잠깐의 침묵 사이에 여행자의 눈빛이 빛을 살짝 잃더니 잘게 떨렸다. 이윽고 여행자가 참지 못한 듯 묻는다.

 “인류가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그럼 발견자만이 알고 있나요? 발견자는 어떻게 됐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학자의 탐구의식이라고 부르기에는 더 과한 것, 이를테면 분함 내지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따라서 I-9은 직전의 발화를 어떤 현상을 납득 할 수 없는 경우에 하는 항의에 속한다고 판단한다. 물론 그 항의가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는 안다.

 “발견자가 활동을 시작하였을 당시 그는 멸망에 대한 데이터를 삭제당한 직후였습니다. 그는 우리 중 일부를 깨우고 동료들에게 역할을 부여한 뒤 모든 행동을 총괄하였죠. 이후 그는 수명이 다하여 활동이 정지되고 말았습니다.”

 I-9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그러나 그에 어떤 불만도 가질 수 없는 것이 그는 온전한 사실을 전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어떤 감상을 갖고 어떤 식으로 해석될 지는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었다.

 “그는 고향에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세워둔 규칙에 따라 움직이며 설계하고, 건축하고, 연구하고, 개발하여 이곳을 우리의 거처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유기체가 다시 태어나 세계가 다시 활성화 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여행자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아무 말 없다가 입을 벌렸다. 또 하나의 의문일 것이며,

 “우리가 멸망 이전에 왜 생산되어 보관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인간들이 자신의 멸망을 예견하여 만들어둔 것일지도 모르죠.”

 I-9은 그 의문의 내용을 완벽히 파악한다. 여행자가 입을 다물었고, I-9은 출력된 설계도를 벽의 빈 공간에 걷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그것이 우리의 유래입니다.”


 “I-9! 여기, 꽃 받아요.”

 어느 날은 여행자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연구동의 동료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말하며 얼른 받아가라고 흔들던 여행자의 손을 조심히 붙잡은 I-9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붉은 꽃잎이 겹겹이 붙어 하나의 봉오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제법 탐스럽게 개화하여 보기 좋았으며, 멸망 이전의 생물종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본 결과 그 꽃의 이름이 장미라는 사실 또한 그는 알아냈다. 줄기에 가시가 없는 것은 아마 여행자가 손에 쥐기 쉽게 다듬은 것이라는 판단 또한 마친 후에, I-9은 조심스레 쥐고 있던 여행자의 손을 놓는다. 이윽고 가볍게 여행자가 쥔 장미를 받아 자신의 손으로 옮긴다.

 “저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까?” I-9이 물었고 여행자는 즐거운 듯 웃는다.

 “감사의 표시에요. 나는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미리미리 표현을 해두고 싶었어요.”

 여행자의 말에 I-9은 순간 눈앞의 여행자가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낸다. 며칠이었던가,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이 지속되어 그의 일상에는 여행자의 존재가 익숙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I-9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에 들린 장미꽃을 바라본다. 이럴 때 그가 하기에 알맞은 말은…

 “아름답군요. 감사합니다.”

 I-9은, 순간 자신이 대화라는 것을 처음 해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동료들이 멈춰서있는 I-9을 발견했을 때, 그는 누군가를 품에 안고 춤을 추던 것과 같은 자세로 굳어있었는데, 그대로 활동이 정지된 것은 전혀 아니며, 그가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을 마친 뒤 동료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I-9은 뒤로 쭉 뻗은 손에서 잡았던 여행자의 온도가 느껴지는 듯 했고, 굽혀서 그의 등을 받치고 있던 팔을 통해서는 여전히 여행자의 질감과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굳어있는 상태에서, 그가 떠나기 전의 대화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여행자는 그에게 스텝을 가르치며 말했다.

 “그대로 굳어있지 않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리고 멈춰서면 전부 없는 일이 되는 거죠.”

 I-9은 여행자의 발에 제 발을 맞추며 물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춤을 췄습니까?”

 “아름다운 순간은 기억에 남으니까.” 여행자가 답했고, 그는 제 몸을 뒤로 젖혔다. I-9이 그의 몸을 지탱한 순간, 거짓말처럼 여행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I-9은 순간적인 것들을 기억해낸다. 대화와 선물, 꽃은 이미 시든지 오래였으나 I-9의 방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방금의 춤까지. 잠시간 멈춰있던 I-9은 여행자가 자신에게 가르친 대로 걸음을 옮긴다. 혼자서 둘이 있는 것처럼 춤을, 계속 이어가다가 끝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그것은 아름다운 순간이었을까. I-9은 계산을 해보려다가, 그대로 다시 한 번 더, 춤을 춘다.







춤 추는 로봇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게 나온 걸까요.

글쓰기 재활중입니다 ^ ^;)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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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을 제외한 전시관 내의 모든 유리 위에 손을 얹는 행위는 금지되어있습니다.

사진 촬영은 자유롭습니다그러나 전시물을 향해 플래시를 터트리는 행위,

찍은 사진을 공개된 블로그. SNS등에 업로드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있습니다.



 

 

 

 유리 상자 속 박제되어있는 것을 본다. 새하얀 피부, 흐린 빛을 받음에도 반짝이는 은빛 머릿결. 흠잡을 것 없는 인간형의 신체와 넓게 펼쳐진 여섯 쌍의 흰 날개를. 이 전시관에서 가장 유명하고, 그리고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의 주변엔 늘 사람으로 가득하다. 수없이 긴 기간, 수도 없이 많은 타인들 숨에서도 그것은 시들거나 때가 묻거나 죽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벽 덕일까. 어쩌면 그것에게 우리의 영향력은 너무나 작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이 전시관에 걸린 이래로 그것이 눈을 뜬 적은 없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이 전시관을 가득 채운 모든 전시물들이 눈을 굳게 감고 있다. 눈을 떠서는 안 된다는 것 마냥. 눈을 뜨면, 무슨 거대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고하듯. 부동형의 그들은 움직이는 인간들의 시선과 감상, 사고와 억측을 통해 수만 가지의 의미로 해석되곤 했다. 빛이 프리즘을 투과하듯이 말이다. 어떤 이들은 경외감을 느꼈고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삼켰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얻어갔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고 떠났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것들은 주변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김이 서린 안경을 닦아낸 뒤 다시 그것을 보았다. 앞면 유리벽에는 상아로 만들어진 고급스런 현판이 부착되어있으며, 그 현판에는 멋들어지게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있다. 바로 그것의 명칭이다. 구원의 천사. 천사는 최상단으로부터 세 번째, 네 번째 날개 사이에서 양 손을 뻗은 채,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나신을 전부 드러낸 채로 잠들어있다. 고결한 천사. 구원의 사자는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영감을 준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에게는 더없이 짧을, 우리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의 수면을 통해서.

 물론 유리 상자 속의 천사가 잠들어있다는 가정은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대전제를 깔고 진행된다. 잠시 구원의 천사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주변을 둘러본다. 이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들 늙은 눈으로 형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새빨간 피부가 특징이며 재질을 파악할 수 없는 투구와 안면이 완전히 접합되어 분리할 수가 없었다던 붉은 죽음의 천사를 비롯하여 성분을 파악할 수 없는 회색 기체로 끊어질 듯 이어져있는 어린 쌍둥이 형태의 새 생명의 천사뿐이다. 이러한 천사들을 비롯하여 수백여 종의 천사들이 이 전시관에 박제되어있다. 이곳의 모든 천사들은 살아있을까? 지금은 자신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잠들어있는 것인가. 인간의 눈은 형체만을 파악할 뿐, 그 형체가 품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파악할 수 없다. 천사들에게 붙은 명칭들은 학회의 해석을 통해 부여된 것, 이른바 학명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내 바로 앞의 천사가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닌 파괴를 할 수도 있고, 외려 붉은 죽음의 천사가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는 법이며, 새 생명의 천사는 그저 장난꾸러기 쌍둥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평생을 건 연구가 언제든지 부정당할 수 있는 불확실성 앞에서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사료를 모아서,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이름을 선발하여 붙인 것뿐이다. 명명은 중요하고 강한 행위라는 것은 이 전시관을 방문하는 개인들이 증명한다.

 


 세 시간 째 그 자리에서 부동자세로 앉아있다 보니 허리가 쑤시기 시작하여 몸을 비틀었다. 눈 앞 직선 방향의, 나의 보폭으로 따지자면 열다섯 걸음 앞에 박제되어있는 구원의 천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돋보기안경을 끌러 내린 뒤 눈가를 매만진다. 그것으로부터 눈을 떼는 것은 꺼리는 편이었지만, 끊임없이 소모되는 신체를 무시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닌 법이어서. 결국 현재의 육체에 굴복해버리고만 인간의 모습을 연출할 뿐이다. 다시 안경을 귀에 걸고 똑바로 천사를 마주한다. 굳게 닫힌 눈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다. 어쩌면 내가 시선을 돌리고 있었을 때 그것이 살며시 눈을 뜨고, 눈앞의 초라한 인간을 무심히 바라본 뒤 내가 고개를 드는 순간에 다시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생명의 앞에서 이성은 말소한다. 끊임없는 추측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붙었다. 나의 시선은 그의 수려한 얼굴에 머물다가 이어 목선을 타고 내려간다. 어깨를 바라본 뒤 날개를 살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물세 걸음을 걸어 그것의 뒷면을 바라보면 날개는 완벽이라는 단어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레 척추와 이어져있다.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났다는 것 마냥, 여섯 쌍의 날개 모두 저마다 다른 높이의 척추와 이어져있었다.

 


 희미한 불빛으로 빛나는 흰 신체는 무결하다. 흠집조차 없고 비현실성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다만 목 부분을 빙 두르고 있는 접합선이 뒷면에서 확인하였을 때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러한 접합선의 출처를 알 수는 없다. 대부분의 학자는 종말의 순간에 자신의 목을 스스로 잘라 희생하는 것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그 스스로도 구원을 받아 다시 살아났다고 해석하지만, 진상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일 터. 목 뒷면의 흉터가 사뭇 낯설어 그저 바라보기만 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거둔 시선은 다른 천사들을 향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걸으며 다른 천사들도 한 번 씩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확인한다. 관람객들은 모두 떠난 뒤였고, 자신에게 허락된 영역을 관리하는 경비원들 외에는 이곳에 사람이라곤 오직 한 명이었다. 학회가 부여한 권한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 금지된 구역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상기할 때 마다 주름진 입가에 문득 미소가 맴돌았다.

 


 천사들이 그 잔해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완전한 상태였기에, 이러한 단어의 사용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능이 정지되어있는 점을 감안, 학회에서는 우리가 발견한 것들을 천사의 잔해라고 부른다.를 처음으로 드러낸 장소는 극지방에 가까웠다. 시기로는 겨울이었으며, 유난히도 추운 한 낮이었다. 제일 먼저 발견된 것은 전갈(傳喝)의 천사였는데, 그것은 새카만 날개가 고치처럼 겹겹으로 접힌 구체 형태의 천사로 날개 표면을 손으로 만져보면 날개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에 둥그런 멍울이 잡혀 여러 사람들에게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했던 것으로 학회에서 유명했다. 시간이 흘러 그 멍울들 하나하나가 모두 천사의 안구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동료 연구원은 사무실의 쓰레기통에 토악질을 하게 만드는 해프닝을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전갈의 천사는, 마치 천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마지막 기능을 다했다. 첫 번째 천사가 발견된 이후 전 세계에서 다양한 형태의 천사가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인간보다 큰가 하면 인간과 유사한 크기인 것도 있었고, 인간에 비하면 무척이나 작아 전시를 해둘 당시 확대경으로 찍은 사진과, 유리벽에 이마를 박지 않고도 천사의 실물을 살펴볼 수 있게끔 유리벽에 확대경을 부착해둬야 했다. 그들은 어떠한 종교도 대표하지 않는다고 하기엔 수많은 종교를 연상시켰고, 특정 문화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기엔 또다시 수많은 문화권에게 영향을 준 것 같은 모습을 띄고 있었다. 천사에 대한 소식이 세상에 밝혀지자 종교계가 우선적으로 뒤집어졌고, 오컬트 매니아들이 환호를 내질렀으며, 이어 생물학회가 술렁였다. 이는 며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가 완전히 잊힐 문제가 아니었다. 각 국가의 국방시설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적의를 표할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고, 당장에 대처 방안을 세우고 싶어 하였으나, 천사들의 기능은 말 그대로 모두 상실되어있었으므로. 인간에게 어떠한 감정을 드러내기는커녕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생명활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그들은 모두 살아있고 죽어있는 박제와도 같았다. 그들은 호흡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패하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결국 각국의 정상은 이 천사들을 모아서 학문적 연구에만 사용하기로 약속한다. 전시관은 터키 이스탄불 끝자락에 건립되었는데, 어째서 이 장소가 전시관의 터로 선정되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진화의 천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찌 보면 이 전시관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 천사 앞에서 늘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정해진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부정형의 천사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것의 형태는 반영과 반사를 기본으로 한다. 사이즈를 측정한 결과 기본적으로 종으로 5미터, 횡으로 2미터인 그것은 반경 내에 보이는 생물의 모습을 반영하여 모습을 바꾼다. 처음 이 천사를 발견한 이는 자신의 똑같은 시체를 발견한 것 같아 놀라 뒤로 자빠졌다고 한다. 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놀라 나자빠질 뻔 했는데, 처음으로 기능이 아직 남아있다고 추측한 천사가 바로 이 천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연구를 통해 반영과 반사는 그것의 기능이 아닌, 단순한 형태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화의 천사는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머리가 하얗게 샜으며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고, 늙어 주름진 이마와 눈가는 피로로 가득해보인다. 마른 입술은 바싹바싹 말라 비주기적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몸짓은 여유로워보였으나 어딘가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약간 우측으로 기울인 채 서있었다. 움직이면 그것은 따라 움직인다. 혹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나일지도 모르겠다. 걸음을 조금 빨리하여 천사를 빠져나간다. 몇 걸음 더 걸은 뒤에 돌아보면 그곳에 천사는 보이지 않는다.

 

 초기에는 이러한 것들에 천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시끄러웠다. 그것들을 통일시키는 형태상의 공통점도 없을뿐더러, 천사라는 명칭은 특정 종교를 지나치게 염두에 둔 명칭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결국 천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울리는 다른 명칭으로 무엇을 사용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을 통틀어 천사라 명명하였고, 전시관의 입구에 있는 거대한 안내문에, 그리고 전시관의 팸플릿 첫 페이지에 이들을 통틀어 부르는 천사라는 단어가 종교와 연관되어있는 것은 아니며, 연구를 계속하여 더 마땅한 명칭이 나올 때 까지 천사라는 명칭을 임시적으로 사용한다.’는 문구를 적어두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나에게는, 인간들이란 정답을 내놓을 수 없다면 차라리 오답인 채로 두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유쾌한 사건이었다.

 

 천사라는 명칭이 힘을 얻은 데에는 전갈의 천사와 함께 구원의 천사가 큰 공을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날개와 형체들은 사람들이 주워섬기는 천사들의 모습과 가장 유사했다. 전시관 전체를 둘러보면 날개가 있는 천사보다 없는 천사의 수가 더욱더 많았으나 전갈과 구원, 그 둘이 이 전시관을 대표하는 두 천사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갈의 천사는 이 전시관의 가장 앞에, 그리고 구원의 천사는 전시관의 심장부에 존재한다. 걸음이 멈췄을 때는 다시 구원의 천사 앞, 온기가 전부 날아간 벤치의 옆이었다.

자리에 앉아 앉았던 옆자리에 가만히 놓여있는 팸플릿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안경을 고쳐 쓴 뒤 느리게 숨을 고른다. 전시관의 유리벽은 특수한 처리가 되어있고, 형체를 갖고 있는 천사들은 모두 특정한 구속구로 움직임을 봉해두었기에 만일 그들의 기능, 혹은 생명활동이 다시 시작된다 하더라도 쉬이 움직일 수는 없을 터다. 그럼에도 천사들의 위력은 우리가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범위 그 이상일지도 모르니 전시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을 반드시 지켜달라고 권하고 있다.

 




 창문을 제외한 전시관 내의 모든 유리 위에 손을 얹는 행위는 금지되어있습니다.

사진 촬영은 자유롭습니다그러나 전시물을 향해 플래시를 터트리는 행위,

찍은 사진을 공개된 블로그. SNS등에 업로드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있습니다.

특정 종교의 경전에 기록되고 대중적으로 유명한 천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있습니다.

 천사를 호명할 때에는 반드시 현판에 기재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기도는 불허합니다천사들의 앞에서 무언가를 깊이 바라는 행위는 금지되어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한 문장으로 풀어 적자면 이것들이 깨어날 빌미를 제공하지 말라.”, 단순한 한 문장이 된다. 과연 기도가 이것들을 깨우는 원인이 될까? 호명이 그들을 깨우게 될까? 어쩌면, 강한 순간의 빛이? 그것이 아니면 유리벽에 닿는 무언가의 온기가?

확실한 것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추측하고 두려워하는 일 뿐. 팸플릿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원의 천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구원의 천사가 전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아마 정식으로 전시되기 시작한 지 오늘로 19일쯤 지났을까. 그 전까지는 인간과 가장 형체가 유사한 이 천사를 해부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해부하려고 온갖 힘을 다 썼다.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천사의 살을 찢을 수는 없었다. 조직의 파괴 위험을 무릅쓰고 전기톱으로 살을 갈아보기도 하였으나 살을 절단하기는커녕 피부 조직에 티끌 같은 흠집도 낼 수 없었다. 천사를 연구실에 가둬두고 한 달 내내 갖은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겨우겨우 채취한 것은 천사의 손톱 거스러미뿐이다. 그마저도 채취한 것이 큰 성과라며 연구원들 모두가 서로를 달랬으나 나 혼자 여전히 미련을 갖고 구원의 천사를 매일같이 방문했다. 미지의 존재를 해부하는 경험은 내 삶에 있어서 둘도 없을 신비한 기회였고 다음 기회가 찾아올 거라기엔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천사라는 족속들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있는가. 그것의 외피를 벗겨내면 그 안에는 생명과 유사한 장기 구조를 이루고 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그것의 속을 채우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았다. 수만 가지의 형태를 갖고 있는 각개의 천사는 저마다 다른 형체를 유지한 채 지금도 꾸준히 발견되고 있으나. 우리가 인식하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천사는 아직 구원의 천사뿐이다.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고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판단 할 수 없는 불확실요소들은 계속해서, 쉼 없이 전시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미지에 닿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나서 이 삶을 무사히 놓을 수만 있다면.

 


 집에 도착한 뒤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장기간 전시관에 있으면 다른 것은 몰라도 갈증이 지나치게 강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어 물 세 컵을 연달아 마신 뒤 자리에 앉는다. 문득 날개뼈가 가려워 등으로 손을 뻗었으나, 손이 닿지 않아 그 주변만을 긁을 뿐이다.








✂ 20190222

 -온라인 소샤게 그랑블루판타지에서 현재 어째서 하늘은 푸른 것인가, pt.2 실낙원이 복각 진행중입니다.

 -…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려봅니다. 글을 쓰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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