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7)

런던의 플랫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기 위해 시어도어 델핀은 거울 앞에 선다. 괜히 멋을 내기 위해 맸던 넥타이가 목을 졸라대는 것 같았다. 그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신나게 드럼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조지 해리슨의 Got my mind set on you가 흘러나온다.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사랑을 하기 전 드는 돈과 시간에 대한 고민이 섞여 있는 신나는 노래는 테디가 그걸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알 수도 없었지만, 어느샌가 자연스레 좋아하고 있었다. 마치 제 취향이 아닌 남의 취향을 옮겨 받은 것처럼. 아무렴 뭐 어쩌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런던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까 괜히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10월 7일에 돌아가려던 일정은 어쩌다 보니 사흘이나 늦어져 10월 10일에서야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앞으로의 일정에 큰 차질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런던의 플랫으로. 거울 앞을 떠난 그동안 깨끗하게 정리한 집 전체와 새로 설치한 계단 중앙의 창문을 다시 하나하나 살피며 계단을 내려온 테디는 제 몫의 짐가방을 집어 든다. 그동안 또 무슨 일을 했더라? 다락에 있는 것들을 전부 치워버렸는데 거기에 뭐가 있었지? 테디는 제 기억의 공백을 천천히 짚어본다. 잊어버린 게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등에 작게 소름이 돋았다. 괜히 찬 바람도 불어오는 것 같고…. 기분 탓이겠지. 불안을 작게 숨기며 테디는 일 층의 긴 복도를 걷는다. 엄마와 아빠, 멜리사를 부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병원에 있다. 오늘 퇴원한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가족들은 전화상으로 상냥하고 다정하게 인사하였고, 테디도 그것이 좋았다. “고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테디가 조심스레 말했고 잠깐의 침묵 뒤에-테디는 그 옆에 있는 고모에게 바로 인사를 건네주나보다 싶었다.-돌아오는 고맙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차례의 인사가 오간 다음 전화는 끊겼는데, 테디는 가족들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초에 원래부터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가족들이라는 데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가 이상하다. 델핀 가족은 원래 다 그런 모양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가 새기는 각인은 그 무엇보다 강하므로.
테디는 마지막으로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쓰레기통의 문을 연다. 얼마 차 있지 않았지만, 갈기갈기 찢긴 택배 송장 뭉텅이가 있었다. 이걸 다 어디로 보내려던 걸까? 주소지조차 명확하지 않고 주워섬길 수 있는 단어라곤 델핀뿐이었는데, 이 집에 델핀이 아닌 자가 있다면 지금도 성명이 조안나 에르난데스인 고모가 유일했으므로 쓸데없는 추측은 않기로 한다. 테디는 괜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게 마음에 걸리니 쓰레기통 속의 봉투를 챙겨 끝을 단단히 동여매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마당을 성큼성큼 걷다가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리버풀의 에버턴, 그곳에 붉은 벽돌집이 있었다.
너른 마당을 끼고 있는, 체스터 형식을 개조한 집의 두 쪽짜리 현관문에는 문고리로 사자가 있었으나 그 사자는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 전인 듯 겁쟁이였고 문을 열면 펼쳐지는 복도를 비롯하여 거실의 마룻바닥 위에 두껍게 깔린 터키시 카펫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비명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좁다란 복도를 간격으로 나뉜 거실과 부엌은 그만큼의 거리와 벽을 두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람에겐 저마다 제 몫의 슬픔이 있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도 나눌 수 없는 슬픔은 스스로 끌어안아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시시껄렁한 TV 프로그램과 타인의 성취에 집중하며 상실을 달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무언가를 만들고 없애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슬픔을 치유한다. 계단 앞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여러 방은 차 있는 날 보다 비어있는 경우가 많고, 이따금 부부는 다른 방을 사용하며 타인이 달랠 수 없는 슬픔을 곱씹는다. 침입자는 제사장의 탈을 쓰고 왼쪽 끝 방의 신단에서 이룰 수 없는 기도를 읊지만, 동상이몽에 빠진 다른 가족들에게 그 문장이 또렷한 무게를 갖고 다가갈 날은 올 것 같지 않다.
난간 없는 계단을 뛰어오르면 카펫은 비명과 소음을 모두 잡아먹는다. 이따금 계단 위를 걷는 자의 다리까지 잡아먹으려 들 때도 있지만 집을 걷는 자가 집에 우호적이라면 집 또한 그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할 터다. 공간은 많은 것을 기억한다. 행복과 다정함도 그렇지만 적의와 슬픔을, 분노와 시기를, 좌절과 상실 또한 기억하고 있다. 뒷마당을 향해 나 있는 유리창은 들어서 밀기엔 너무 무겁고 언제 떨어져 깨질지 모르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이다. 그런 계단을 올라 2층에 닿으면, 터키시 카펫의 후임으로 자리한 옥스민스터 카펫이 마룻바닥의 비명과 함께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기억을 단단히 가둔 채 깔려있고 왼쪽 끝의 아이들 방을 시작으로 저마다의 추억을 지닌다. 왼쪽으로부터 두 번째 방은 비어있는 시간이 길었지만 언제나 그 형태를 잃지 않을 것이고,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 방은 그가 지닌 상실의 무게 만큼 자주 바뀌거나 혹은 이 이후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리라. 커튼의 색은 바꿔야 할 것이다. 상앗빛은 그 무엇을 지킬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멜리사가 금방 알아차리기를 바란다. 서재는 잠들어있다. 슬픔에서 도망치기 위해 작은 아이가 언젠가 번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은 그 아이를 잃음으로써 상기된 목적을 잃었으므로. 다른 누가 그 안의 장서를 들여다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내내 굳게 닫혀있으리라. 왼쪽 끝의 방은 언제나 창문이 열려있을 것이고 시계는 멈춰있을 터다. 그 누구도 방문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구의 위에는 두꺼운 모포가 덮여 가구들이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두겠지.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공간이 필요할 때, 집은 기꺼이 2층의 왼쪽 끝 방을 내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집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집에는 규칙이 있었고 어떤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다락에는 반드시 올라가지 말 것. 테디는 집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면서 중얼거렸다. 다락에는 그 무엇도 없지 않다. 오히려 모든 것들이 다락에 있다. 누군가가 숨겨놓은 비밀, 슬픔, 불안, 질투, 분노, 상실감, 좌절, 절망, 필요 충분의 애정, 집착, 열등감과 죄책감, 두려움과 공포, 의심과 불신, 맹목과 불친절, 편애와 상처 같은 것들이. 집을 이루는 사람들의 어두운 부분을 모두 끌어안았으며 집안의 모든 것을 느끼는 다락의 문도 열지 말 것. 만일 그 문을 열어 내부를 확인하게 된다면 분명 끔찍한 일을 당할 터다. 다락에 난 좁은 창문을 아무리 두드려봐도 규칙을 어긴 자를 구하러 올 사람은 없다. 다락은 비명과 울음마저 집어삼키게 되어있으니까.

라임스트리트역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 델핀은 자신이 부친 택배가 잘 가고 있을지 잠깐 걱정한다. 이 많은 화물을 다 옮기시겠다고요? 심지어 하나는……. 난처한 낯을 그리고 있던 택배사 직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몇 차례의 대화가 오간 뒤 무사히 배송이 이루어진다고 하였고, 어제까지 짐을 모조리 싸서 보냈으니 이제 도착할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방 두 개짜리 플랫이 꽉 차버릴지도 몰랐다. 가장 큰 짐은 집이 아닌 다른 자리로 옮겨주어야 했다.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그는 떠오르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중얼거린다. 그가 뒤로하는 리버풀의 에버턴에는 미스터 앤 미세스 델핀과 에르난데스 부인, 그리고 멜리사 델핀이 지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두 쪽짜리 현관문을 비스듬히 열며 시어도어 델핀을 부르던 가족들은 돌아오는 적막에 급하게 온 집안을 헤집어놓는다. 벽장에도, 방 안에도, 마루 밑바닥에도, 오븐 안에도, TV 속에도 테디는 없다. 테디의 방에 놓여있던 라디오만이 계속해서 노래를 뱉어낼 뿐이다.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왼쪽 끝의 방까지 확인한 델핀 부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락의 문을 열고, 튼튼한 사다리를 올라 그 안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그가 비명을 지른다. 엘리엇이 떠났어. 엘리엇이 우릴 떠났어! 몇 시간 뒤 런던의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한 델핀은 미지의 대륙을 밟듯 들뜬 걸음을 내디딘다.

 

 


<끝>

 

 

 

 

◆ 기본 안내사항
제목: 역할 바꾸기 놀이
장르: 고딕 호러
전체 분량: 95,068자
작업 기간: 20220502~20220524
개요: 마흔두 살의 테디 델핀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족과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상한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인가?

자작캐릭터 시어도어 "테디" 델핀 개인만족용 고딕호러 로그입니다. 본편을 한번에 올리기는 너무 길어서 분할해 올립니다. 편하게 읽어주세요. 각 편마다의 후기는 밑에 ▼

7. 그리고 남은 사람은 후기
7편의 플레이 리스트이자 이 글의 엔딩곡은 조지 해리슨의 Got my mind set on you 입니다. 그래서 나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집에서 배 긁으며 놀고 있는 오리지널 테디는 위기감을 느껴서 운동하러 바깥으로 나갔다네요. 즐겁게 읽어주셨을까요? 제가 쓰면서 즐거웠고 힘들었던 만큼 읽는 시간이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본래 규격대로 읽고 싶으면? 포스타입에서 읽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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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기차를 타고 이동했더니 몸이 피로했다. 엘리엇 델핀은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으로 가기 전에 간단한 요기라도 하고 갈까 고민했으나 결국 라임스트리트 역에서 나오자마자 캡을 잡아 에버턴으로 향했다. 리버풀에 돌아오자 습한 공기를 통해 더욱더 선명하게 테디를 느낄 수 있었다. 공기에 찬 기운이 서서히 스미는 10월이었고 리버풀의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어둑어둑했다. 매년 돌아오는 가족 행사는 지나치게 단조로웠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엘리는 그런 식으로라도 사랑하는 형을 기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엘리엇은 블랙 캡의 유리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창밖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지긋지긋한 리버풀은 엘리에게서 테디를 앗아간 뒤에도 무너지지 않고 멀쩡한 그대로였다.

테디가 일곱 살의 나이에 죽은 지 이제 몇 년 째더라…….

아마 그가 무사히 살아있었다면 마흔두 살쯤 되었으리라. 엘리는 테디가 살아있었다면 두 사람이 같이 만들었을 수도 있던 추억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테디에게 엘리와 함께 사는 건 괴로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테디는 꾸준히 그를 질투하고 그를 미워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질투와 부정적인 마음까지도 엘리는 모두 사랑했다. 엘리는 두 쪽짜리 현관문을 열면 그 너머에 서 있을 테디를 떠올렸다. 우울한 표정으로 오늘은 평소보다 늦었다고 따져 묻는 그의 낯이 선명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그에게 사과하고, 뺨에 입을 맞추고 끌어안아 몸을 간지럽히리라. 엘리는 허공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캡 비용을 계산한 다음 택시에서 내렸다.

그곳에 집이 있었다. 리버풀의 어둑한 하늘 밑으로,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은 매년 보아도 커다란 몸집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에는 조금 더 집이 커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에 드리워진 상앗빛 커튼은 벽에 빼곡히 난 창을 이빨처럼 보이게 만든다. 엘리엇은 별 감흥 없이 마당으로 들어가려다, 발에 담배꽁초라 밟혀 걸음을 멈춘다. 델핀 씨의 사유지 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는 없었다. 멜리사는 한때 피웠었지만, 연인인 틸튼이 폐암으로 죽고 난 뒤로는 손도 대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금연을 강요할 정도였다. 엄마와 아빠는 마찬가지고. 불청객인 고모 또한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의 주인이 누구인지 감히 추측해볼 수조차 없었다.

의아함을 뒤로한 채 엘리엇 델핀은 바쁘게 걸음을 옮겨 두 쪽짜리 현관문 앞에 섰다. 습관처럼 사자 머리의 문고리를 붙잡고 두드리려 손을 뻗자 문은 부드럽게 열린다. 문 너머에는 집이 있었다. 긴 복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거실이,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었고 정면에는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의 바로 앞에서 옆으로 꺾으면 부부의 방, 그리고 손님용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펼쳐진다. 일층 왼 끝의 방은 고모가 머무는 손님 방이었고 거기서 방 한 칸의 간격을 두고 부부의 방이 있다. 복도와 계단 위를 덮은 카펫은 발소리를 잡아먹고 소리도 없이 계단을 오르면 두 층 사이의 공간에 자그마한 창이 하나 나 있어 뒷마당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 위층에 오르면 긴 복도가 있었고, 왼쪽 끝부터 순서대로 테디와 엘리의 방, 엘리의 방, 그리고 멜리사의 방과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서재가 있다. 집은 두 개의 층으로 끝이지만 위층의 복도 천장에는 다락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집에 있는 가족으로는 엄마와 아빠, 멜리사와 고모가 있었고 엘리엇은 언제나 방문객이었다. 집안 곳곳에서는 일곱 살에 죽은 테디가 여전히 그 존재를 선명하게 지니고 있지만, 그 기척을 느끼는 건 엘리뿐이었다. 문이 열린 집 안으로 들어갔어도 아무도 그를 목소리 높여 환영하지 않았다. 아마도 모두가 외출한 모양이지. 엘리는 개의치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엘리엇은 계단을 오르던 도중 의아한 기분으로 걸음을 멈춘다. 서늘한 바람이 밖에서 불어오고 있다. 열릴 리가 없던 위층과 아래층 사이의 창문이 처참하게 깨져있다. 깨진 유리창의 파편은 말끔히 정리되어있지만 예리한 날을 드러내며 부서진 창 너머로 10월의 으스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앗빛 커튼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다가 부서진 창문의 예리한 부분에 걸렸다. 엘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커튼을 구해주려 하였으나, 부주의한 손길에 의해 상앗빛 커튼을 결국 찢어져 못 쓰게 되고 만다. ‘고모가 아시면 난리 나겠군.’ 엘리는 한숨을 내쉰다. 깨진 창문을 안 깨진 것으로 만드는 방법 같은 것은 몰랐다. 아마 가족들이 집을 비운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그들 모두 기술자를 부르기 위하여 리버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으리라. 다른 데에 들러 요기를 해결하지 않고 집으로 바로 오기를 잘했다. 우연히 그들과 마주치며 이후 동행까지 하게 될 불쾌한 가능성을 회피했다는 추측이 올해 진행될 3일간의 장례가 작년까지의 의식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미약한 기대를 싣는다. 그는 깨진 유리창을 뒤로하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어렸을 적에는 곧잘 테디와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내기를 하곤 했다. 승부의 결과는 언제나 엘리엇의 승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엘리가 이기면 테디가 울어버리고 마는 게 제법 성가셨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가끔 테디가 이길 수 있게 속도를 늦추곤 했다. 어린 테디는 최선을 다해 계단을 올랐고, 계단 위에서 엘리엇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는 말했다. “엘리, 내가 이겼어! 오늘은 진짜 기쁜 날이야!” 엘리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사랑스레 웃는 그의 낯에 가슴이 설레는 기분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들 때까지 재미있게 놀자!” 두 소년은 손을 꼭 잡고 왼쪽 끝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라디오를 틀어서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거나 장난감을 갖고 놀곤 하였다. 그때가자신 있게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었다.

엘리엇은 계단 위에 테디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너무 소중해서 그런 것일까. 그는 그 자리에 테디가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괜히 그에게 말을 건다.

테디. 얼른 방에 가서 같이 놀자.”

테디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이 놀자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는데. 엘리는 의아해하며 계단의 끝까지 올랐다. 어린 테디의 작은 몸은 항상 겁에 질린 듯 위축되어있어 돌이켜 생각해 볼 땐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다. 어린 애가 뭐가 그렇게 무섭고 두렵고 슬픈 게 많았을까? 지금의 엘리도 그 질문에는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없다. 엘리는 테디의 작은 어깨 위로 손을 얹는다.

테디, 괜찮아?”

테디는 작게 고개를 젓는다. 그는 목소리를 내서 답하는 것보다 그게 더 편한지 팔 하나를 느리게 들어 제 동생에게 왼쪽을 가리킨다. 엘리는 순순히 그의 팔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왼쪽 끝방은 분명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두었다. 테디가 이 자리에 없다는 기억을 상기시키는 일은 엘리에게는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고 엘리엇에게 슬픔이란 불쾌감, 내가 나를 잃을 것만 같은 감각, 발밑의 지반이 약해지는 것과 같은 기분을 연쇄적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모습을 유지한 채, 가구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가구들 위에 상앗빛 모포를 덮어둔 뒤 문을 단단히 잠근 지 이제 스무 해가 넘어갔다. 그랬던 테디와 엘리엇의 방은 굳게 닫혀있어야 했으나, 엘리가 뒤를 돌아 그 문을 바라보자 문은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열렸다. 오래되어 조금만 움직여도 끼이익 거리던 문이 어떠한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모습과 마주하자 엘리엇은 슬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위화감과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느낀 의아함이 헛된 게 아니라는 추측을 품는다. 엘리엇은 이제 겨우 일곱 살로 보이는 제 형을 뒤로하고 복도의 옥스민스터 카펫 위를 소리 없이 걷는다. 그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방문은 아가리를 벌리듯 서서히 벌어졌다. 방의 문턱에 선 엘리엇은 뒤를 돌아보았으나 테디는 그 자리에 없다. 활짝 열린 문 너머가 이상하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너머의 공간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허락해 줄 수 없다는 것처럼. 아마도 먼지 때문이겠지. 엘리엇은 가볍게 생각하며 문턱 너머로 발을 내디딘다.

방은 무척이나 깔끔했고 그래서 놀라웠다. 엘리는 이 방의 자물쇠를 걸어 잠근 뒤 어떠한 청소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밝고 건강하게 지낸다 한들 테디의 흔적에 다가가게 되면 놀랍게도 어떠한 의욕도 들지 않았다. 동시에 타인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과 테디가 아닌 다른 그 누구도 둘의 추억에 손대지 말기를 엘리엇은 간절히 바랐다. 데번의 블라이스로 떠나면서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열쇠를 챙겨 떠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일 년마다 테디가 없는 끔찍한 집으로 돌아와 방의 상태를 확인한 데에도, 자신과 사랑하는 형의 추억을 그 누구도 침범하게 둬선 안 된다는 어떠한 집착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열린 방으로 발을 내밀어 들어갔을 때, 방은 엘리가 기억하는 그 모습이 아니었다. 엘리엇과 테디가 사용하던 두 개의 침대는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붙어있었다. 먼지가 잘 날리지도 않는 것을 보니 누가 청소를 한 게 분명했고, 가구를 덮고 있던 모포들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방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남아있던 건 벽에 걸린, 멈춰버린 시계였다. 엘리엇은 누가 이런 짓을 했을지 떠올린다. 유력한 용의자는 아마 고모일 것이다. 고모는 가족들을 선동하여 이상한 장례 절차를 고집하곤 했다. 어쩌면 엄마일 수도 있었다. 엄마도 가끔 테디를 그리워했으니까. 아빠일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술에 취하면 가끔 뜬금없는 행동을 하곤 한다. 또 어쩌면 멜리사일지도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이 방에 들어왔다가 꼴을 참고 볼 수 없어 다 청소해버렸을지도. 의혹은 있으나 확증은 없었다. 엘리의 등 뒤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엔 테디가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할을 바꿔보니까 어때?”

테디가 조용히 묻는다. 엘리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작게 웃으며 자신이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테디는 엘리엇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다.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말랑하고 따뜻한 온기가 엘리엇의 거친 손에 온전히 온기를 전달했다. 테디는 그를 침대로 이끌고 가 침대에 가볍게 걸터앉은 뒤 엘리를 올려다본다.

살아있는 건 만족스러워?”

이건 허깨비다. 이상한 것을 너무 많이 봐서 내가 지금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엘리가 대답하지 않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이 그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다. 어쩌면 테디가. 엘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젓는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아. 네가 없으니까 이 세상은 아무런 재미도 없어.”

그렇구나.” 테디의 목소리는 별 감흥이 없었다.

테디, 네가 보고 싶어. 이런 머릿속의 환상 같은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여기 있어. 엘리.” 테디는 제법 날이 선 채로 말했다.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형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엘리엇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고, 시어도어도 더 따지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있고 나서 테디가 다시 물었다.

블라이스는 어땠어?”

어떻냐니그냥, . 그랬지.”

엘리는 블라이스에 어떠한 기억도, 심지어 강렬한 기억이나 불쾌한 기억, 친구들에 대한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테디를 잃은 후 그 누구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이어갈 수 없었다. 타고난 성품 덕에 사랑받았지만, 그런데도 엘리엇과 블라이스는 단 하나의 연결고리조차 남지 않았다. 방학마다 뻔질나게 집으로, 리버풀로 돌아오는 탓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졸업식 직전에 학교에서 귀신이 나왔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기는 하였다. 엘리는 그 소문을 들으며 귀신을 무서워하는 테디가 이 학교에 들어왔으면 정말 힘들었겠구나, 따위의 생각을 할 뿐이었다.

친구는 없었어?” 테디가 날 걱정할 처지가 되던가. 엘리는 속으로 그를 작게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테디는 사교성이 없다.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도 쉽게 하지 못하고, 누가 말을 걸어오면 냅다 울어대기 바빴으니 언제나 엘리가 중재자가 되어주어야 했다. 테디는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없었어. 가볍게 얘기하는 애들은 있었는데, 지금까지 연락하느냐면. .”

그런데 이건 왜 물어보는 거야? 마치 내가 만든 환각이 아닌것처럼. 엘리는 불안한 눈으로 테디를 바라본다. 일곱 살이었던 테디는 어느새 13학년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는 엘리에게도 익숙한, 블라이스의 교복을 입은 채로 엘리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있었거든. 친구들이.”

엘리는 바람 빠지듯 허? 소리를 내며 그의 문장에 섣불리 대답한다. 뒷말은 겨우 뒤따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슬슬 내 역할을 돌려받아야겠어. 엘리엇. 너도 나만큼 살아봤으니 이제 공평하지?”

테디가 말을 마치자 창문이 벌컥 열려 방 안에 바람이 들이찬다. 열여덟의 테디는 침대의 이불을 집어 들어 엘리엇의 머리 위를 덮었다. 머릿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간단하단다. 시체 위에 천을 덮고 입을 다물게 하는 것, 창문을 열어 그들이 자유롭게 나가게 하는 것. 그리고 시계를 멈춰두는 거야. 그렇게 해야 영혼이 어딘가에 갇히지 않고 떠날 수 있거든. 잘 알겠지? 엘리는 지금 이 동작이 바로 자신의 장례 절차라는 걸 깨닫는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테디의 손이 단단히 엘리의 입을 다물게 눌렀다. 테디가 자신의 장례를 치른다는 것보다도 그에게 자신 말고도 또 다른 존재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었다. 엘리엇은 버둥대다가 서서히 몸에서 힘이 빠져 침대 위로 쓰러진다.

있잖아. 나는 네가 나 대신 살면 정말 멋있게 살 줄 알았어. 엘리. 너는 그런 애니까. 너처럼 되고 싶었는데.”

테디는 엘리를 덮은 이불을 걷어낸다. 그 밑에는 아무도 없다. 마흔두 살의 시어도어 델핀은 두통을 호소하며 자신의 몸이 한 팔십 년은 살게 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듣는 이는 없었지만. 그는 이불을 조심조심 접어 침대에 얹어두며 말을 잇는다.

너도 내가 없으니 고장 난 것처럼 살더라. 전혀 멋있거나 근사하지 않았고 질투할 구석도 없었어.”

테디는 작게 웃는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라디오가 Since I don’t have you를 재생했다. 강렬하게 시작되는 기타 소리에 묻힐 듯 말 듯, 테디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기뻐.”

 

마흔두 살의 시어도어 델핀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찬바람에 몸을 잘게 떨었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 해봤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107일 오전이었다만, 지금도 같은 날이라고 볼 수 있을까? 테디는 제대로 소리를 내며 화면에 불이 들어오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민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런던에 있는 방 두 개짜리 플랫에. 어찌 되었든 휴가가 끝이 나서 출근을 해야 했고, 곧 있을 출장 준비도 끝마쳐놔야 했다. 테디는 자신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예전부터 근무하여 더 높은 직급을 가진 동료 직원들을 떠올리다가 한숨을 내쉰다. 그 사람들은 분명 좋은 이들이었지만 그들을 떠올리는 그것만으로도 피곤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친구들에게도 따로 연락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또 소식도 없이 사라지면 다들 놀라겠지. 혼나는 건 싫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도중, 창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힌다. 활짝 열려있던 문도 매서운 소리를 내며 닫혔고, 자물쇠가 잠기듯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테디는 당황하였으나 먼저 나서서 움직이진 않았다. 방 안의 가구들이 불안하게 떨듯 흔들렸지만, 테디가 디딘 바닥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라디오는 비명 지르듯 you를 연호하는 부분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엘리엇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소리는 없지만, 이 집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게 된 테디는 그렇게 판단한다. 나는 너 없이 외로움만 알고 살았단 말이야. 친구도 안 사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고.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었어. 시어도어. 그런데 너는 왜 나만 생각하지 않았지? 라디오는 결국 비명을 내지르다 못해 스파크를 터트린 뒤 작동을 멈추었고, 멈춰있던 시곗바늘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창문이 요란스레 덜컹거렸고,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손톱을 세워 문을 벅벅 긁고 있는 것처럼 소리가 들려온다. 나보다 네가 약하잖아. 너는 나 없이는 안 돼. 계속 힘들게 살았잖아. 그게 당연한데 왜 친구 같은 걸 만들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건데? 이해할 수가 없어. 집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테디는 자신에 대한 엘리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을 잃어버린 뒤에도 잘 살 줄 알았다. 그는 강한 사람이니까. 뭐든 할 줄 알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슈퍼 보이였으니까. 그 때문에 다락에서 떨어지며 역할을 그에게 넘겨주었을 때도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분의 인생밖에 가질 수 없다면 더 잘 살 것 같은 사람에게 주는 게 나았다. 잠깐이나마 자포자기했던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수치심은 없었다. 시어도어 델핀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테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제 턱을 매만진다. 벽이 흔들리기 시작해도 여전히 그가 디딘 바닥은 견고했다. 테디는 조용히 엘리엇을 부른다.

맞아. 엘리 네 말대로 나는 많이 약해.”

테디의 목소리에 집의 떨림이 차츰 잦아든다. 약하면 전부 나한테 맡기고 숨으면 되잖아. 맨홀 뚜껑 밑으로, 지하수도로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곳으로. 그러면 무서운 것도 슬픈 일도 불안할 일도 없을 텐데. 문이 벌컥 열린다. 복도의 불이 모조리 꺼진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 너머는 지나치게 어두웠다. 시커먼 구렁에서 서서히 손이 올라온다. 마르고 약한, 상처가 가득한 손이 문턱을 겨우 쥔다. 엘리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네가 나 없이 행복해지는 건 인정 못 하겠어. 나만 외롭기는 싫어. 엘리엇은 계속해서 시어도어를 저주했고, 테디는 그의 모든 말을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들으며 검은 구렁 너머의 제 동생을 바라본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해. 그것도 좀 많이. 너 하나로는 안 돼. 미안.”

그리고 말이야. 테디는 잠깐 고민하더니, 제법 매정한 투로 말했다. 엘리는 테디가 매달릴 때 좋아했다.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원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이 답이 제 동생을 무력화시키는 말로 제일 적합하다는 가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넌 죽었잖아.”

검은 구렁에서 먹구름이 몰려든다. 테디의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흐리고 어둑한 리버풀의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어도어 델핀은 어둠 속에 갇혀버린다.

 

박수 소리에 테디는 정신을 차린다. 낭독회 일정이 완전히 끝이 나고 자리를 정리하려던 찰나, 친구들과 그를 아는 일부가 다 같이 모여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기분 좋게 위스키를 홀짝이던 테디는 제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에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멋지다, 테디! 누군가 뱉은 말에 그는 손을 내밀어 이리저리 젓는다. 아니야. 진짜 멋진 건 너희들이야. 오늘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 테디는 하나하나 손을 잡고 인사를 한 뒤 가끔은 상대를 꼭 끌어안기도 하였다. 모드가 운영하는 펍도 슬슬 폐장시간이 다가와 하나둘 불이 꺼진다. 불을 끌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져갔고, 마침내 테디가 혼자 남자 주변은 새카매졌다.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디더라. 테디는 우선 걷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지금이 어디쯤인지 전혀 모르겠다. 테디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주변을 둘러본다. 여전히 온통 새카맣다. 집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시어도어 델핀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셨기로서니 집으로 가는 길을 잃는 일은 없었다. 그랬다면 진즉에 끊었겠지. 함께 술을 마신 사람들을 집이나 근처의 호텔에 던져넣고 술기운이 좀 달아나길 바라며 집까지 걸어가는 게 그의 일과였고, 지금 그에게 남아있는 취기도 딱 그만한 정도였다. 그러니 길을 잃을 리는 없다. 테디는 그렇게 확신하고 걸음을 멈춰 주변을 둘러본다.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린 그는 망설이지 않고 걷는다. 저 멀리 어디선가 통, . 하고 공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걸어가 보니 소리가 가까워져 공이 단순히 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라켓에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라는 걸 깨닫는다. 밝은 연두색 공은 바닥을 한 번 딛고 이쪽으로 넘어왔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한다. 제 발치까지 날아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테니스공을, 테디는 멍하니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델핀! 제대로 안 뛰어?” 날카로운 불호령에 정신을 차리자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테디가 그 자리에 있었다. 테니스 코트의 맞은편에는 아일린 웨버가 잔뜩 성난 얼굴로 라켓을 휘두른다. 5 파운드아니, 10파운드가 걸린 내기 테니스는 점점 살벌해지는 국면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테디는 지칠 대로 지쳤다. 체력이 나쁘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긴장한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금방 체력이 꺾여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10파운드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는데도, 최선을 다하라는 아일린의 명령에 그만 온 힘을 다하고 말았다. 테디는 네트를 넘어 달려드는 공을 겨우겨우 받아낸다. 그렇지만 힘겹게 돌려보내면 매섭게 돌아오는 공을 제대로 받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고, 머잖아 세 번째 세트와 10파운드를 쟁취하는 것은 아일린이 된다. 그냥 10파운드를 미리 줄 걸 그랬어.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고 생각하면서, 시어도어 델핀은 테니스 코트 바닥에 드러눕는다.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아일린은 델핀의 옆으로 걸어오면서 땀에 젖은 얼굴로 어딘가 개운해 보이는, 그러나 동시에 꾸중을 쏟아낼 것만 같은 눈빛을 보낸다.

좋은 경기였어.” 테디는 가라앉는 숨소리와 함께 그리 말했다. 아일린은 누가 보면 그랜드 슬램이라도 출전한 줄 알겠다며 얼른 일어나라는 듯 그에게 손을 내민다. 내미는 손을 붙잡고 일어나 터덜터덜 운동장 가장자리로 걷는 둘은 잠시 말이 없다. 느리게 숨을 고르고 난 뒤에, 테디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묻는다.

있잖아. 아일린.”

패배자의 변명이라면 미리 사양할게.” 아일린은 제법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테디를 돌아봤다.

변명이 아니라, 아일린은 테니스를 잘 하니까 테니스만 하면 언제든 이길 텐데. 왜 체스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체스 실력은 형편이 없다 이건가?”

테디는 그게 아니라며 갖은 단어를 쓰며 변명한다. ‘도전정신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는 다음에 체스 경기에서 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단 선전포고만을 남긴 채 아일린은 자리를 홀연히 떠났다. 블라이스의 저녁은 고요했고 곧 소등시간이 다가온다. 어둠에 내리눌린 교정은 불안이나 비밀로 들끓고 악의적으로 편집된 누군가의 치부를 드러낼 것이다. 테디는 지레 겁에 질려 기숙사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항상 바빠 보이는 아일린은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하면서 사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한편 그리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못내 부러웠다. 테디는 걸음을 이어나가며 생각한다. 아니다, 이건 부러움처럼 순수한 게 아니라…….

 

시어도어 델핀은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한 길을 걷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블라이스의 13학년 방학 보충 수업 기간에 있었던 일은 지워지지 않을 상흔으로 남았으며, 이따금 그를 괴롭히기도 하였지만 그런데도 다시 돌이켜보니 마냥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생각을, 그제야 하게 된다. 거기엔 친구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친구들이 있었다. 테디는 타인의 비밀에는 눈을 가리고 잊어버린 척하곤 하였지만, 가끔 그 날카롭게 편집된 문장들은 수면 위로 떠오르듯 개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내 비밀도 다른 누군가에겐 그렇게 느껴지겠지. 그렇기에 친구들은 모이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지켜보는 감시자의 역할로.

테디의 머리 위에 둥그렇게 달이 떠올랐다. 밤이어도 한밤중인 모양이다. 제 다리를 스쳐 지나가는 털 뭉치가 느껴져 테디는 잠깐 놀랐고, 달빛을 받으며 고양이가 내는 울음소리를 따라간다. 그 걸음이 닿는 끝에는 애셔 레살롯이,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꼭 타인에게 받음으로써 배웠을 애정과 다정함이,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강렬한 감정을 볼 때마다 테디는 아주 오래전에 어떤 아이를 보았던 것처럼, 그걸 잡아먹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는 생각을. 주제넘게도 했던 것 같다. 저렇게 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테디는 알고 싶었다. 무엇이 그를 살게 만드는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전체론적인 질문 따위는 아니다. 테디 델핀은 순전히 애셔 레살롯이 궁금했다. 무엇이 그를 그 순간만큼은 로맨스의 주인공처럼 만드는지. 어떻게 한순간 이렇게나 빛날 수 있는지에 대해.

나에게 고양이를 길들이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

이 이상은 감히 안 된다면서 선을 긋는 문장은 유려하고 동시에 엄했다. 그 순간 테디는 호기심을 잃는다.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려 하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는 언제나 겁이 많았기에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고, 그래서 그 이후에는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따라 기숙사로 향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애셔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 그때 알게 되었더라도 크게 변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오히려 불멸의 사랑을 품고 있는 그가 괜히 질투 나지 않았을까. 갖지도 못하는 것을 어설프게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괜히 고생이나 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그때의 시어도어는 멍청하고 미숙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전혀 나아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눈부시게 환한 달빛을 뒤로하고 테디는 집을 향해 걷는다. 어느덧 술은 완전히 깨버렸다. ‘한잔 더 하고 갈까.’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던 테디는 너덜너덜한 간판과 유리 벽 너머로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술집의 문을 연다. 문을 열자마자 조셉 스콰이어가 시계를 확인하며 불러놓고 왜 이렇게 늦어?”라며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테디는 작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인사한 뒤 그의 옆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오늘은 진짜 적당히만 마시고 가는 거다. 조셉의 경고에 테디는 반항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식으로 만난 게 몇 번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시어도어 델핀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할 때마다 주변의 도움을 받고는 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세 사람이 조셉과 모드, 로즈였고 세 사람 모두 저마다 맡은 역할이 달랐다. 일단 들어줄 사람, 그리고 잔소리와 응원이 필요하다면 모드에게 갔고, 다 내버려 두고 도망칠 장소가 필요하면 로즈에게로 갔다. 조셉을 필요로 할 때는 실제로 할 수 있을지 아닐지는 둘째 치더라도 실용적인 조언 등을 바랄 때렸다. 테디는 자신만의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고민을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어느 순간부터 조셉은 테디가 아무 말 않고 앉아있어도 재촉하지 않았다. 테디가 연거푸 두 잔을 비워내면 눈빛으로 무어라 말하긴 하였지만, 평소에 눈치 없이 산 덕에 눈치 없는 척을 하여도 진짜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은 편리했다. 테디는 애초의 고민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은 채, 떠오르는 말을 느리게 뱉는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이기는 걸까?”

?”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듣자 조셉의 인상이 느리게 구겨진다. 별 고민 없는데 부른 거면 난 간다. 매정하게 말하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조셉이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린다. 애초에 그는 일어날 마음도 없었으리라. 저 좋을 대로 생각하긴 하는 거였지만, 이쯤 되니 슬슬 조셉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뭘 그런 걸 물어보고 있냐고 되물으면서도, 잠깐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셉이 무던히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고민했다는 사실조차 납득가지 않고 불쾌한 것처럼 보였다.

그야 살아있으면 그게 이기는 거지. 바보냐?”

살아있으면 다 이기는 거야?”

이론적으론.”

대꾸하며 그는 제 앞의 잔을 비운다. 애초에 죽은 사람하고 산 사람 사이에 이기고 지고를 따지는 것부터 쓸데없는 일이다. 살아있는 놈 중에서 이겨야 할 놈들 머릿수를 세기에도 바빠 죽겠다. 그가 늘어놓는 투덜거림이 듣기 좋아 테디는 느리게 웃는다.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는 듯 둘은 자연스레 일어나 헤어진다. 허리를 굽히지도 않고 개선장군이 걸어나가듯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테디는 저렇게 강한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가,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될 수는 없다는 결론과 함께 다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검은 길은 이따금 일렁거리면서 그의 방향을 바꿔놓거나 아니면 길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한다. 테디는 막힌 벽에 이마를 찧고 울상을 짓거나, 아니면 그대로 넘어진 다음 느릿느릿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일까? 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집이 어디지?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많았다. 리버풀 에버턴에 있는 붉은 벽돌집, 블라이스, 세인트앤드루스 칼리지, 런던의 방 두 개짜리 플랫을 제외하더라도 그가 머물렀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이 가야 할 집이 어디인지, 테디는 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해 머리가 아파져 온다. 그의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영국 히스로 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곧 도착합니다. 어느덧 습하고 어둑어둑한 영국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하늘에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것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미국은 이제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지만, 매캐런 국제공항에 떡하니 설치되어있는 슬롯머신으로 인해 잘못하면 여기서 인생이 거덜 나겠구나 하고 돌연 겁이 났던 것도 기억이 난다. 집이라 부를 만한 곳이 어디든, 그리로 가고 싶지 않아 도망치듯 선택한 게 미국이었다. 단순히 로즈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도착해버린 다른 대륙은 테디에게 너무나도 컸다. 당장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로즈가 한달음에 달려 와준 덕이겠지. 얼마든지 있다 가도 좋다는 그 말이 테디가 들은 말 중 가장 고마웠던 말일 것이다. 그 이후의 시간 또한 포함해서.

미국에서 지내며 있었던 많은 일은 무척이나 많았고, 가본 곳도 많았으나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기억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누워있던 어느 낮의 일이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로즈는 테디가 떠날 때까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테디는 어디까지나 방문객의 위치에서 깊은 자신을 드러내지도, 로즈의 영역에 깊이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 굳이 깊은 것을 공유하지 않아도 일상적인 친절과 편안함이 주는 소중함을 이제는 안다. 테디는 집으로 돌아가면 미국에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하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세인트앤드루스 또한 소중한 집이다. 정확하게는 로즈와 모드, 그리고 테디 자신이 셋이서 지내던 방이. 그 안에서 떠들고 공부하고 놀고 바보 같은 짓들을 하던 모든 게 더없이 소중했다. 혼자서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지만 몇 번 이야기를 나누면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 나올 터다. 소중한 것은 잊을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다.

 

모드에게 전화해보면 집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줄까? 검은 길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그를 이끌고 테디는 결국 걸음을 멈춘다. 무턱대고 걸어봐야 소용없었다. 그는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진 모드의 펍을 슬쩍 본 다음 모드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그러는 도중 모드가 펍의 문을 벌컥 열었고, 테디는 당황하여 뒤를 돌아본다. 모드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사정을 대강 알았다는 듯 그에게 손짓한다. 마흔두 살의 테디는 그때에도 보기 흉할 정도로 울고 있었고, 다 큰 남성의 눈물이라는 걸 신비한 전설처럼 여기는 영국 사람들은 길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그를 박물관의 전시품을 보듯 빤히 바라보면서 길을 걸었다. 모드의 손에 이끌려 그의 펍으로 들어간 테디는 항상 앉는 바 테이블의 자리를 비켜주는 손님에게 고맙다고 짧게 인사하였고, 자리에 앉는다. 모드는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고 하는 대신 그가 항상 마시는 술을 잔에 가득 따라 건네준다.

테디는 잔을 비우고 난 다음 뚝뚝 흘리던 눈물을 그제야 정리한다. 모드는 그동안 맞은 편의 못난 친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추려보며 이번에는 뭐 때문에 울고 있는지를 따져본다. 좀처럼 가늠은 되지 않았으니 이제 그가 말하게 둘 수밖에 없었다. 테디는 이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는 불안감에 울고 있었다.

오랜만에 리버풀로 가게 됐어. 며칠 못 올 것 같아.”

집으로 가는데 왜 그렇게 울어?” 모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섣불리 물었다가, 이내 그의 사정을 복기하며 입을 다문다. 그러나 전부 괜찮았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대로 남아있는 거고, 굳이 상기시키지 않으면 잊어버릴 정도로 어떤 상처는 무척이나 사소해진다.

가족들이 너무 많이 바뀌어있으면 어쩌지? 날 못 알아보면?” 테디는 중얼거리면서 늘어놓았다. 가족들은 가끔 이상한 구석이 너무 많아.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았던 것 같아. 물론 배은망덕한 헛소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늘어놓을 필요가 있었고, 마침 모드가 들어주어서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테디는 생각한다.

모드가 뭐라고 했더라, 일단 부딪쳐보면 뭐가 되든 되지 않겠느냐고 그런 것도 같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고, 값을 낸 다음 캡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모드의 질문에는 고개를 젓는다. 술기운이 적당히 떠나갈 때까지 길을 걷는 건 좋아했고, 뭣보다 남들을 다 재우고 뒷정리를 마친 다음 집으로 돌아가서 잠자는 게 테디에게 익숙했으므로. 테디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펍을 빠져나와 런던 시내로 향한다. 그런데 집이 어느 방향이더라?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모드에게 캡을 불러달라고 해볼까? 테디는 뒤를 돌아봤지만, 등 뒤는 그저 새카맣기만 할 뿐, 모드의 펍도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등 뒤로 홀연히 바람이 불어왔고 테디는 바람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걷는다.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회사 사무실 안의 테이블 앞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결국 회사로 와버렸구나. 테디는 제 문제의 심각성을 슬슬 알아차리면서 자리에 앉아 사무용 컴퓨터를 켠다.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쌓인 휴가를 전부 사용하겠다고 이야기하고 팀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대꾸한다. 가족끼리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그런데 그게 뭐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폐쇄되어있는 사무실에는 계속 테디의 등 뒤로 바람이 불었고, 창문이 열려있나 싶어 뒤를 돌아본 테디는 홀리데이와 눈을 마주친다. 테디는 더 할 말은 없다면서 전화를 끊었고 바깥으로 달려나간다. 가끔은 그 순간에 뛰어나가 붙잡아야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함이 있었고 홀리데이 또한 그랬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찾아올 때면 그게 잠깐은 놀랍다가도 이후의 시간이 그저 즐거웠고, 종일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아쉬웠다. 내일 또 보자고 인사를 하기는 하지만 내일 못 볼 것을 알고 있다. 홀리데이는 바람이었고 바람을 붙잡는다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그저 변덕스러운 바람이 가끔은 이 근처를 지나치기를, 지나치다가 내 생각을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지지대가 없고 소식 없이 사라지는 데에는 시어도어 델핀도 소질이 있긴 하였으나 쏟아지는 비구름은 고이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홀리데이가 떠나간 자리에 길이 남아있었다. 테디는 검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눈으로 구분이 가능한 길을 걷는다. 조심조심 걷는 걸음은 길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이대로 길을 따라간다고 해서 집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내 집은 어디일까? 홀리데이는 어디든지 자신이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것이다. 테디는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짚을 수가 없었다.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은 너무 멀었고 블라이스와 세인트앤드루스는 이미 떠나온 곳이었다. 런던의 플랫은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언제고 집을 비워줘야 하는 판국이었다. 그렇게 따져보면 나는 집이란 게 없는가 보다. 그 생각 끝에 누군가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테디 자신의 울음은 아니었다. 길은 점점 넓어져 여러 갈래로 흩어지더니, 블라이스 건물 뒤편의 너른 공원으로 펼쳐진다. 거기에는 장미 덤불이,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팔과 손가락을 요란하게 흔들며 계속 타오르는 야트막한 불꽃 같은 숲이 있다.

 

울음소리의 주인을 찾아 계속 걷자 그곳에는 피비 팔머가 있었다. 어느 순간이었는지 테디는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블라이스의 유령은 할퀴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거기엔 피비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 애들이 유난히 어두운 비밀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신앙심이 유난히 나빴던 건지, 또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원한을 샀는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유령은 이유를 대지 않는다. 그들이 들춰내는 비밀을 마주하면 굳건한 사람도 가끔은 흔들리거나 무너진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상황일 뿐이었다.

테디는 피비의 손을 잡았고,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지금까지 피비에게서 위로를 받은 만큼 피비를 위로해주고자 하였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슬픔에 저항하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일상적으로, 평생을 슬프게 울면서 살아온 이는 적당히 요령을 부리기만 할 뿐이다. 죽음을 부정하는 이와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이가 서로를 위로한다. 피비의 울음이 그치고 난 다음 둘은 계단에 앉아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형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어떤(어땠던), 그리고 지금은 뭘 하고 있을(하곤 했던)지에 대해서. 죽은 이의 무덤 위로 보내는 추측은 현재시제였고 가끔은 미래시제이기도 하였다. 둘만의 비밀스러운 장례가 끝이 나고 둘은 기숙사 건물로 돌아가 헤어진다. 깊은 밤을 숄처럼 두른 블라이스에게 홀로 떠돌아다니다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하여.

 

이상했다. 타인에 대한 기억들이 결국 나에 대한 기억으로 귀결된다는 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않기로 한 테디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등 뒤로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걸 안다. 도망치기 위해서는 계속 걸어야만 했다. 블라이스의 유령이, 엘리엇이, 스스로 가진 질투와 자포자기, 불안과 우울, 공포와 분노 같은 것들이 한데 엉겨 그의 등을 두드린다. 그들은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다.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에 있었을 때, 테디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집이 저주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는 저주가 없다. 저주에 걸린 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다. 붉은 벽돌집에 사는 가족들, 블라이스의 친구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런던의 플랫에 사는 시어도어 델핀까지 모두 저마다의 저주를 짊어진 채 산다. 그들의 슬픔이나 상실, 분노와 질투, 미움과 집착, 우울과 애정 등이 고이고 고여 땅 깊은 곳까지 집어삼킨다면 그때에는 집에도 저주가 깃들 수 있겠으나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집 또한 저주에 걸리는 게 옳은 절차이리라. 하지만 그런 종류의 공포는 먼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사람에게 주어진 저주가 중요했다. 언제까지고 등을 돌려봤자 쫓기는 신세를 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테디는 잠깐 고민하듯 앓는 소리를 낸다. 마지막으로 할 만한 가장 근사한 일이 바로 등 뒤에 있었다.

테디는 몸을 일으켰고, 뒤를 돌아본다. 자신에게 걸린 저주가, 블라이스의 유령이, 엘리엇이, 타인에 대한 질투와 잊을 수 없는 상실감과 바닥없이 가라앉는 막막함과 끝도 없는 슬픔이, 그리고 자신을 계속 상처입히기만 하는 애정이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린다. 드디어 잡았다. 그게 말했고, 커다란 아가리 안으로 테디는 걸어서 들어간다. 드디어 집에 도착한 것 같아.

 

 

 

◆ 기본 안내사항
제목: 역할 바꾸기 놀이
장르: 고딕 호러
전체 분량: 95,068자
작업 기간: 20220502~20220524
개요: 마흔두 살의 테디 델핀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족과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상한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인가?

자작캐릭터 시어도어 "테디" 델핀 개인만족용 고딕호러 로그입니다. 본편을 한번에 올리기는 너무 길어서 분할해 올립니다. 편하게 읽어주세요. 각 편마다의 후기는 밑에 ▼



6. 테디 후기
6편의 플레이리스트는 건스앤로지스의 Since I Don't Have You 입니다. 이러나 저러나 두 형제의 코어같은 곡을 뽑으라면 이것이겠어요. 개인적으로 "돌아왔다" 라고 표현하기에 알맞은 챕터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에서는 전에 트윗을 통해 빌린 딸기겨울의 캐릭터분들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어요! 멘션을 주신 분들 만! 포함했고 러닝 도중 나눈 대화/애프터로 푼 썰들 등을 취합해서 날조하여 썼답니다.... 쓰는 도중에 친구들을 너무 도구화하지 않나 하고 걱정됐었는데 만일 불쾌하게 느껴졌다면 제가 사죄하겠습니다.... 미리 머리 박아요. 최대한 조심했는데 잘... 그게 됐을지는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이 편을 쓰기 위해 계속 쓸 수 있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본래 규격대로 읽고 싶으면? 포스타입에서 읽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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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델핀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집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정신을 차려보니(이런 표현 또한 미묘하다. 정확한 언어를 찾기엔 이 현상 자체가 기이하여 그리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엘리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집에 서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엘리엇의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을 때였으리라고, 스스로 추측했지만, 확신은 없다. 테디에게 그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는 엘리는 마흔한 살의 모습인데도 일곱 살처럼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고모가 자주 드나들면서부터는 가족들이 좀 이상해지긴 한 것 같아. 멜리사도 처음에는 말리려고 했대.”

그 시점부터, 정확히는 관이 붉은 벽돌집의 다락으로 옮겨져 엘리엇이 집의 일부가 되었을 때부터 엘리는 집안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테디는 그와의 기억을 공유한다. 고모는 낯선 기도문을 읽었고 종종 십자가를 뒤집어 놓았으며 가끔은 가족들을 모아 둘러앉히고는 이상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언제나 상앗빛의 레이스 달린 천이 사용되었고, 몇 차례의 의식이 끝난 뒤에는 집안을 이루는 천이 대부분 상앗빛으로 바뀌었다. 상앗빛 커튼이 드리운 집의 창문은 바깥에서 보면 앙다물고 있는 입의 이빨 같았다. 고르지 못한 치열을 가진 집은 가족들의 의지에 따라 변하고 바뀌었다. 엘리엇은 불쾌하단 표정으로 제 장난감을 집는다. 팔이 부러진 플라스틱 티라노사우루스의 표정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티렉스를 제 옆구리에 끼워두고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테디는 그동안 다락의 다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초와 성냥이 있어야 해. 아니면 적어도 불을 켤 수 있는 거. 여긴 너무 어두워. 바닥을 조심조심 살피며 걷는 테디의 등 뒤로 비틀즈의 Yesterday가 들려왔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사랑스러운 동생은 원하는 것 찾았다는 듯, 떡갈나무 관의 널찍한 모서리 위에 작은 라디오를 올려둔다. 라디오는 오래되었고 긴 기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것처럼 소리를 뱉어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엘리엇이 말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이 노래가 아니잖아.” 테디는 짐짓 날카로운 투로 대꾸하고는 기어이 향초와 성냥을 찾아내 엘리에게로 돌아갔다. 엘리는 잠깐 우울한 표정을 흉내 내더니 깔깔 웃으며 잘생긴 얼굴이 더 보기 좋게 주름을 패어냈다. “역할을 바꾼 건 이제 제자리에 돌려놓자는 거야?” 테디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런, 테디.”

엘리엇은 좀 더 놀고 싶을 때마다 그랬듯, 인상을 작게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팔짱을 낌으로써 자신을 무장한다. 어떤 말도 듣지 않을 테니 내 말을 들어달라는 일종의 시위였으나 지금 테디에게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역할 바꾸기 놀이는 끝나야 하고, 서로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젠 놀릴 사람도 없지 않나. 테디의 주장에 엘리엇은 결국 팔짱을 풀어내며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 놀이는 이걸로 끝이야.”

엘리는 잠시 틈을 주고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내 취향 대부분은 형의 취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건 이해해 줘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테디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면서 물었다. 아직 엘리엇의 존재가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엘리는 죽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사랑스러운 웃음을 내비치는 존재는 물론 엘리였지만, 동시에 엘리는 떡갈나무 관 속에서 부패하여 뼈만 남아있는 상태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엘리엇의 뼈와 혼뿐이다. 그의 살과 피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고 무슨 수를 써서도 되찾을 수 없다. 테디는 그 부분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나한테 써준 일기.”

엘리는 설마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라며 추궁하는 눈빛으로 테디를 바라봤다. 테디는 한 박자 늦게 깨닫고는 그의 시선을 피한다.

뭐야? 너무해!” 엘리엇은 괜히 빽 소리를 질렀다.

그걸 정말로 읽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

테디는 조심스레 대꾸했다.

읽었다기보단 가끔 느껴졌어. 테디 네가 나한테 건넨 말들이나, 네가 나에 대해서 한 생각, 타인과 나눈 내 이야기, 내 이야기와 함께 있는 네 이야기 같은 것들.” 엘리엇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그는 이 다락방의 위태로운 마룻바닥에 누워 그대로 잠이라도 들 듯 평온한 표정이다.

테디, 네가 날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걸 전부 느낄 수 있었어.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내겐 당연한 일이야.”

…….”

가령 네가 날 미워했을 때도,”

테디는 엘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네가 날 잡아먹고 싶어 할 때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어. 넌 그때마다 울더라.”

시끄러워.” 테디의 말끝이 날카로워진 것을 느끼자 엘리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 나는 네가 날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게 얼마나 좋았는데. 테디,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 줄 알아?”

엘리엇은 몸을 일으키고, 테디에게 다가갔다. 그는 뒤에서 테디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그의 어깨에 제 뺨을 얹은 채로 가만히 사랑스러운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테디는 직전에 엘리엇이 한 말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기느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낮은 숨만 흘렸다. Yesterday 이후 재생되는 노래는 Yellow Submarine이었다. 그러나 나른하고 평화로운 노랫소리도 멀어지고 적막이 감도는 다락의 한구석에서는 두 형제의 조심스러운 숨소리만 공연히 울려댔다. 테디는 엘리엇을 보면서도, 그리고 제 몸에 얹어진 그의 무게와 그의 향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가 이곳에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엘리는 죽었다. 여섯 살의 어느 가을, 비가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날에. 맨홀 뚜껑에 빠져서 머리를 부딪치고 그대로 추락하여 사망했다. 대처가 빨랐으면 어찌어찌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과정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는 없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테디는 엘리엇을 부정하지 못했다. 부정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감정이다.

질투는 추한 거야.”

엘리엇은 테디의 목에 코를 파묻으며 웃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엘리엇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질투는 달콤한 거야. 테디 너도 다른 사람의 질투하기를 바라잖아.”

엘리는 손을 뻗어 테디의 팔을 매만졌고, 그의 손을 덮었다, 손가락을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웠고 마치 갖고 싶은 장난감의 포장된 상자를 매만지듯 조심스러웠으며, 동시에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사한 사람이 되어서, 다들 널 질투하길 바라잖아.”

테디는 낮게 숨을 뱉어냈다.

어릴 땐 그랬지.”

지금은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저.”

이젠 왜 사는지조차 모르지?”

엘리엇이 그의 말을 가로챈다. 테디는 일순 말을 잃는다. 부드럽게 열렸던 집안의 모든 방문이 하나하나 닫히기 시작하며 매서운 소리를 냈다. 어떤 문은 지나치게 세게 닫혀 두 사람이 있는 바닥을 뒤흔들 정도였다. 엘리엇은 테디를 진정시키려는 듯, 그의 뺨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고 떨어진다.

찾고 있어.”

테디는 겨우 대꾸했다. 엘리는 찾았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낮게 웃는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테디는 엘리의 웃음이 각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끄러워지면 어우,” 라고 말하며 웃었고, 기분이 좋을 때는 온 얼굴을 접어가며 환히 웃었다. 타인의 말에 긍정할 수 없거나 그를 비웃을 때는 낮게 웃는 소리만 내곤 했고, 그럴 때마다 테디는 기민하게 알아차려 그와 말다툼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싸울 힘조차 남지 않았다. 집안의 모든 방문은 굳게 닫히고 단단히 맞물려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형체 없는 누군가가 복도를 지나다니며 문을 두드렸지만, 이 집에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둘뿐이다. 질투와 애정이 뒤엉켜 검은 곰팡이처럼 벽면에 얽혀있다.

어릴 적에는 너처럼 되고 싶었지. 그렇지만 전부 지난 얘기야.”

말을 마치며 테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어두운 공간을 밝힐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며 다락의 마룻바닥을 느릿느릿 걸었다. 엘리엇의 품에서 벗어나자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았어도 죽었어도 엘리엇은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기억만 하고 있던 게 선명한 실체로 나타났다고 해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느냐면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얄미웠으며,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구석이 있고, 사람이 그어놓은 선을 자연스레 무시하는 데에 도가 텄다.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보이곤 하며 양보를 할 때는 가끔 아쉬워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런 모든 요소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테디는 기억할 수 있다.

문득, 테디의 발에 무언가가 걸려 내려다보니 발치에 오래된 성냥 상자와 상앗빛 양초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테디는 몸을 굽혀 그것들을 주운 다음 엘리를 돌아보았다. 엘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느끼고 있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 수 있어. 집안의 방문을 모두 걸어 잠근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읽힐 수밖에 없어. 테디의 시선에 엘리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나 상아색 싫어해.”

가족들 때문에?”

엘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테디는 그 이유가 맞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낸다. 그래서 숨겨두고 있었구나. 테디는 그가 싫어하건 말건, 성냥을 하나 꺼내 불을 붙였고 양초를 밝힌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세워둔 다음, 은은한 빛에 의지하여 다락을 다시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엘리엇의 물건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가 살아있던 6년의 기간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들이 다락에 가득 담겨있었다. 그것들은 벽을 빼곡 채웠고, 바닥을 빈틈없이 막는 모양새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가족들은 왜 물건들을 여기로 옮겼을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꽉 닫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2층까지 올라왔으나 다락으로 이어지는 문은 절대로 두드리지 않았다. 무언가의 기척은 다락으로 이어지는 문 밑을 어슬렁거리더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테디는 어느덧 엘리의 사진이 잔뜩 쌓인 곳으로 갔다. 그가 태어난 직후 울고 있는 사진부터 보자기에 둘러싸여 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진, 테디와 함께 아기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는 사진 따위가 늘어서 있었다. 첫 생일,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리고 여섯 살……. 엘리의 생애는 수많은 사진으로 남았고 인화되어 실체를 가진 채 다락에 봉인되어있었다. 여섯 살의 비 오는 어느 날 엘리엇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테디는 사진을 아무렇게나 넘긴다. 일곱 살 생일이라는 풍선 글자들의 밑으로 웃고 있는 엘리의 모습이 보였다. 멜리사가 어렵게 그의 뺨 위로 키스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사진 속 남자아이의 눈빛은 엘리엇의 것과 똑 닮은 푸른빛이었다. 그건 이따금 붉은 광원 앞에선 회색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테디는 의아해하며 사진을 넘겼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엘리엇은 당당한 표정으로 학교 건물을 등지고 서 있다. 그의 옆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멜리사가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의 흰 여백에는 테디에게. 네 몫까지 열심히 학교 다닐게!’라는 내용으로, 삐뚤빼뚤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뭔가가 이상하다……. 고모는 죽은 애의 이름을 테디라고 기억했다. 테디는 제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알코올성 치매거나 노망이 들어 발생한 인지의 오류거나, 또는 괴이한 암시이리라고 생각했다. 집에 처음 온 날 테디는 자신이 죽어서 다시 리버풀에,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에 도착한 것인지 자문했다. 상앗빛 커튼을 걷자 창문에 맺히는 상으로 그런 의문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가족들의 장난이 고약하지?”

그제야 엘리엇은 테디에게 다가가, 온전한 형태와 무게를 지닌 채로, 사진을 쥐고 있는 테디의 손을 감싸 붙잡았다. 그는 테디의 손에 들린 사진을 빼앗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불쾌한 모독이라도 마주한 것 마냥, 그의 낯에는 언짢은 빛이 섞여 있다.

하지만 내가 진짜로 살아있었으면 정말 즐거웠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테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 눈앞의 또렷한 형체와 온도를 지닌 제 형제가 정말로 살아있는 게 아닌가?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었지? 만일 내가 죽은 게 맞다면, 나는 죽어서도 그를 질투했으리라. 살아있는 그를 질투하고 그의 생을 잡아먹으려 들었을 것이다. 죽어서도 추한 존재로, 괴담으로, 유령으로 남아 집을 떠돌았겠지. 닫힌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열린다. 그는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존재조차 믿기가 힘들었다.

다음 노래는 Let it be였다. 엘리는 라디오를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테디를 바라본다. 공포에 떨고 있는 그의 낯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열망하듯이, 조금 더 그가 흔들리기를 바라듯. 마침내 무너지는 순간을 기다리듯 그의 눈빛은 끈질긴 구석이 있다. 테디는 엘리엇의 손을 뿌리치고, 불이 붙은 양초를 집어 들었다. 녹아내리는 촛농이 손바닥에 닿아 따끔하고 뜨거운 감각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엘리의 묘비로 다가간다. 먼지 잔뜩 낀 비석을 손으로 닦아내자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투명한 비석만이 그 자리에 있다.

의심하지 마. 죽은 건 나야.”

이제는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조차 모르겠다. 엘리엇은 어느새 관에 누워있던 것인지, 떡갈나무 관에서 몸을 세워 앉아 팔을 걸치고 테디를 바라본다.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노래 가사가 둘 사이에 흐른다.

어쩌면 너일 수도 있어.”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폐쇄된 공간에 순식간에 바람이 불었고 테디가 들고 있던 양초의 불이 무력하게 꺼진다. 다락과 2층으로 이어가는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사다리가 펼쳐진다. 테디는 양초를 내려두고 열린 문으로 걷는다. 정사각형의 문 너머를 내려봤지만 불 꺼진 복도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시어도어는 복도의 불을 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복도 천장의 전등은 빛을 밝히는가 하더니 비명처럼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뱉으며 산산이 조각난다. 엘리는 여유를 잃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테디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어차피 이젠 아무런 의미 없는 거야. 누가 죽었든지 말이야. 테디.”

내가 죽었으면, 너처럼 되고 싶었던 나는 뭘까?”

테디는 울적한 목소리로 엘리에게 묻는다. 검은 구렁 너머에 조명이 서서히 들어온다. 붉은 웅덩이가 있었지만, 그 위에 누워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다리를 오르던 건 엘리였다. 어린 그는 고개를 들어 두 어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엘리엇과 시어도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작은 것에게 돌아가라고 입 모양으로 말을 건넨다. 마침, 밑에서 테디가 울음을 터뜨리고 엘리는 급히 뛰어 내려가듯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바닥에 뛰어내린 그는 붉은 웅덩이에 누워있다, 머리는 사다리에 부딪혔는지, 아니면 맨홀 입구에 부딪혔는지는 알 수 없다. 노란 우비는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지만 쏟아지는 비에 붉은 증거는 연신 씻겨 내려간다. 푸른 눈은 이따금 녹색으로 바뀌고,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 없어.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가 아니야.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서로 역할을 바꿀 수 있고,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도 바꿀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해온 놀이잖아.”

이 놀이를 계속하자고 할 셈이야?”

테디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어왔다. 엘리는 고개를 젓는다.

너는 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런던의 방 두 칸짜리 플랫으로.”

엘리는 테디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는다.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부드럽게 숨을 쉬었다. 테디가 이 집의 마당을 밟을 때부터 나던 낯선 향은 리버풀의 것이,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에 속해있던 게 아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고, 엘리는 그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테디의 집은 한때 붉은 벽돌집이었으나 어느 순간에는 블라이스였고, 지금은 런던의 방 두 칸 짜리 플랫이다. 테디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엘리 또한 이 집에 남은 애정이라곤 없었다. 그가 가진 애정이라곤 순전히 테디를 향해있다는 걸 자신의 형은 알까. 질투와 애정은 그 근원이 같았고 테디가 자신에게 질투를 쏟아붓는 만큼 엘리는 그를 사랑했다.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었던 유년기다. 시간이 뒤엉키고 집이 녹아내리는어쩌면 녹아내리는 것은 집이 아니라 두 사람일지라도이 순간이, 시점을 빼앗은 지금 이 순간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랑하는 형을 잡아먹을 기회임을 엘리엇은 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상관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날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델핀 가족은 105일부터 107일까지 3일간 시어도어 델핀의 죽음과 그의 생애를 추억하는 시간을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간다면, 나랑 같이 가. 혼자서 집을 걷는 건 이젠 싫어.”

엘리엇은 테디를 부드럽게 민다. 그의 몸 위를 덮듯 자신의 몸을 포갠다. 열린 다락의 문 밑으로 둘의 몸이 내리꽂혔다.

 

 

 

 

◆ 기본 안내사항
제목: 역할 바꾸기 놀이
장르: 고딕 호러
전체 분량: 95,068자
작업 기간: 20220502~20220524
개요: 마흔두 살의 테디 델핀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족과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상한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인가?

자작캐릭터 시어도어 "테디" 델핀 개인만족용 고딕호러 로그입니다. 본편을 한번에 올리기는 너무 길어서 분할해 올립니다. 편하게 읽어주세요. 각 편마다의 후기는 밑에 ▼

5. 엘리엇 후기
5편 플레이 리스트는 비틀즈의 Yesterday와 Yellow submarine, 그리고 Let it be 입니다. 상대적으로 좀 짧아요. 무엇보다 "형제" 라는 부분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 부분을 쓰면서 어라 약간 근친같나? 했는데.... 피를 나눈 자들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잖아요? 아닐 시 여러분이 맞습니다... 근친 또한 오래된 공포의 대상이라고 생각해보면

본래 규격대로 읽고 싶으면? 포스타입에서 읽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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