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디퍼 (5)

♥1. 2013년 12월 24일 오후 6시 00분~6시 15분. 아가리 밖

 평소 같았으면 크리스마스 준비 막바지 단계에 들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시간일 터였으나, 올해는 부득이하게도 일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쿠키는 이미 다 구워둔 상태였고, 트리를 장식하고 싶었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해주리라. 아쉽기는 해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 게 있다면 키리에 언니의 출산 예정일이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는 사실(닥터 언니의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즈음일 것이라고.)과, 내가 맡은 임무에 대한 것뿐이겠지. 어느새 어두워진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맡은 임무는 아저씨와 함께 수상한 병원(지금은 운영되지 않는다. 낡고 무서운 분위기.)을 조사하고, "미확인 생명체"를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만 가기에는 위험한 임무이니 지원 인력 세 명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내용도, 오늘따라 유난히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에단 오빠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저씨가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기에 내 전화를 건네주고 지원 인력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약간의 불안함과, 두근거림을 품고 도로 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검은 중형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나온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였다. 저들이 지원 인력일까? 점점 다가온다.


 "어머, 이런 일에 어린애를 끌어들이다니. 그쪽도 참 대단하네요. 세상의 시선이 두렵지도 않나봐요?"

 익숙한 목소리. 설마. 나는 다가오는 여자에게 달려간다. 아저씨가 놀랐는지 날 따라온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달빛을 받았음에도 먹색 머리카락은 빛나지 않는다. 창백한 피부만이 진주처럼 밝게 빛날 뿐, 임무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겨울용 원피스가 눈에 들어온다. 검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모습이었다. 보라색 눈은 날 바라보고 있고, 입가에는 웃음이 그려져있다.

 "올해는 산타할아버지가 주는 선물 받을 수 있겠어요? 일찍 못 잘 것 같은데."

 그녀가, 언니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랜만이에요. 이스티."


◆1. 2013년 12월 24일 오후 6시 15분~6시 20분

 에단 녀석과의 통화를 급하게 끝내고, 꼬맹이를 따라가서 만난 지원 인력은 익숙한 얼굴의 김명희와, 정부쪽 관계자인 윤견호였다. 세 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라는 질문을 둘째 치고, 우선 김명희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겠지.

 저 여자를 본 것도 거의 일 년 만이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나 궁금하기도 했는데, 뭐. 괜찮게 지냈나보다. 김명희는 날 보고 살짝 고개를 까딱한다. 여전히 예의 없는 여자다. 윤견호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부족한 몸이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인사를 한다. 도대체 무슨 임무이기에 정부 쪽 관계자까지 끌어들이는지. 카페에 돌아가면 에단을 달달 볶아서라도 알아내야겠다.


 "그건 그렇고, 저기죠?"

 김명희가 손으로 병원을 가리킨다. 이제는 이름도 없는, 낡아버린 병원의 모습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병원을 노려본다. 저런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겐느냐만은. 께름칙한 느낌이 들어 다가가기 싫다. 윤견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김명희가 무섭기라도 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서 가죠. 개냥이씨 애 낳기 전에는 돌아가야 할 거 아니에요."

 "뭐야, 너. 그건 어떻게 아냐?"

 "쓸 만한 정보통한테 들었어요."

 하늘빈이겠지. 꼬맹이는 어딘가 들뜬 표정이 되어있었다. 아마 저 여자를 오랜만에 만나 기분이 좋나보다. 반갑지. 그야 그런데.


 "어이, 꼬맹이. 헤실헤실 웃지 말고 임무에 집중하자."

 "누가 웃었다고. 아저씨나 잘 해."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 없는 꼬맹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병원을 향해 걸어간다. 다른 녀석들은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 전화로 에단을 추궁했음에도 나오는 정보는 전혀 업었다. 통화를 끝낼 때 개를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 그래. 혹시 '개를 조심하라.'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원 인력들에게 묻는다. 꼬맹이 녀석은 알 리가 없겠지.

 "개한테 물리지 말라고 조심하라는 거 아닐까……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는 건 윤견호였고.

 "글쎄요. 별 의미 없어 보이는데." 표정을 지우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건 김명희였다.


 전혀 도움이 되질 않잖아. 나는 한숨을 쉬며 병원의 문을 열었다. 기분 나쁜 병원냄새가 훅 끼쳐온다.


♥2. 2013년 12월 24일 오후 6시 42분~50분부터, 아가리 안

 이곳은 예전에 동물병원이었던 모양이다. 팀을 나눠 병원을 살펴보던 도중, 병실에 가득 늘어있는 여러 가지 크기의 우리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열려있는 것도 있었으며, 굳게 잠겨있는 것도 있었으나 그 안에 동물이 갇혀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뭐, 당연한 일일까.

 조사를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지났음에도 별 소득은 없었다. 아저씨에게 뭔가 찾았냐고 물어보았으나 상황은 나와 똑같은 듯싶었다.


 "이런 데에서 대체 뭘 찾으라는 건지. 에단 녀석. 오늘 가만 안 둘 거야."

 "아저씨는 요즘 에단 오빠 얘기만 하는 것 같네."

 아저씨가 몸을 흠칫, 떨고는

 "내, 내가 언제? 착각이야. 어서 다른 데나 조사하러 가자고."

 라며 먼저 앞서나간다. 아저씨를 따라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강아지가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1. 2013년 12월 24일 7시 13분부터

 밖에서 본 병원의 모습은 안에서 보는 모습보다는 그나마 낫게 느껴졌다. 벗겨진 페인트칠과 빗물에 씻겨 내려간 흔적. 떨어지고 깨졌거나 혹은 남아있지만 신문으로 봉해 내부를 볼 수 없게 해둔 창문 등은 언젠가 TV에서 본 납량특집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평범한 장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귀신이 나온다면 나올 것이고, 이런 장소에 필요한 인간은 나나 이스티, 중학생 씨, 윤견호 씨가 아니라 무속인 이겠지.

 그러나 현실은 납량특집이 아니다. 위쪽에서 받은 임무이면 분명 더러운 것이 연루되어 있을 터. 동물병원이었다는 이 장소의 내력을 생각하면 위험요소가 무엇인지 그리 짐작이 가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귀찮네요."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병원 밖에 서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


 팔짱을 끼고 다시 한 번 병원의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이득이 되는 정보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 자꾸 켕기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글쎄,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잘 있을까. 개냥이씨는. 오늘이 예정일이라던데. 잠시 태평한 생각을 하며 천천히 병원의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늑대, 혹은 개가 낮게 그르렁 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병원에 아직 동물이 남아있는 걸까? 내가 생각한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병원의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의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까지 홀에 굴러다니던 소파와 여러 가구들도. 이스티와 하진혁 씨도. 원장실에 들어가 있을 윤견호 씨는 안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겠지.


 사라진 둘이 걱정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뒤에서 컹.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2. 2013년 12월 24일 7시 00분~7시 10분

 "아, 잠깐."

 나는 뒤를 돌아봤다. 꼬맹이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날 따라오고 있었다. 다른 길로 빠지면 어쩌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그건, 뭐 아무래도 됐고.

 "좀 이상하지 않냐? 이 병원."

 무슨 의미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꼬맹이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쉰다.

 "이 병원, 사람도 안 올만한 곳에 세워졌으면서 쓸데없이 크다고. 그렇게 생각 안 해?"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뭔가 귀찮은 게 있을 것 같아서 그런다. 여기서부터는 나눠서 둘러볼까 하는데. 너, 설마 무서워하는 건 아니지?"

 "……아니거든. 그러던가."

 계획대로. 나와 꼬맹이는 따로 이 병원을 조사하기로 했다. 꼬맹이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에단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혁아, 아무리 내가 좋은 건 이해하지만 나 지금은 좀 바쁜데."

 신호음이 채 두 번도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은 에단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한가하잖아.

 "죽고 싶냐."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야?"

 나는 미간을 손으로 문질렀다.

 "너, 아는 거 일단 다 말해봐."

 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담배를 꺼내들었다.

 "으음,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없어. 정말로."

 "대충 아는 거라도 좋으니까 일단 말해봐."

 라이터가 어디 있더라……. 젠장. 떨어뜨렸나. 에단은 또다시 조용해지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말했다.

 "그러니까, 거긴……."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와 전화의 내용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주변은 검게 물들고 설상가상으로 통화권을 이탈해버리기까지.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상황이야. 나는 큰 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그 소리마저 개들의 울음소리에 묻히고 만다.



 ♥3. 2013년 12월 24일 7시 10분부터

  사방에서 강아지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주변이 검게 물들었다. 이윽고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새까매진 공간에 홀로 서있는 신세가 되었다. 강아지가 우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든다. 위, 아래, 가리지 않고, 온 사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져 몸을 웅크리고 앉는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꾹 감으며, 누구라도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도와줘…….



J1. 2013년 12월 24일 8시 03분

 원장실의 문이 굳게 잠겨버린 관계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갇힌 상황이 되어버렸다. 뭐, 그래도 다행일까. 나는 원장실의 낡아빠진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 방금까지 읽었던 기억을 천천히 정리했다. 특별히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겁이 많고 돈 욕심이 많았을 뿐인 동물병원의 원장은 '특별한 만남'을 계기로 괴물을 만드는 실험을 실행했다.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들을 주워서(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주변의 기억을 읽어야 알겠지만.), 혹은 아프다는 이유로 주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과 함께 데려온 강아지를 맡아 진료한다는 거짓말을 하여 그 모든 유기견과 강아지들을 어떤 특별한 괴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병원을 향한 손님들의 발걸음은 끊겼고, 병원의 원장 또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어…….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해 정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꾹꾹 눌러 지압한다. 이러는 경우가 한두 번은 아니니 그리 당황스럽지도 않지만, 중요한 순간을 노리고 지끈지끈 아파오니 조금은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릿속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지금은 열렸을까 싶어 일어나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 병원의 어떤 힘이 원장실의 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일까. 힘을 주어 밀어보아도 열리지 않아 포기하고 원장실을 한 번 더 둘러보기로 했다.


 원장실 전체를 차지하는 커다란 책상과 책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장에는 수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아니, 꽂혀 있었을 것이었다. 지금은 텅 비어 먼지만이 외롭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원래라면 동물들의 사진을 모아둔 스크랩 북 및 여러 동물과 관련된 책들이 꽂혀있어야 할 터였다.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지는 과거의 모습을 털어버리고 몸을 숙여 책상 밑을 살폈다. 책상 밑은 이렇다 할 특이한 것들은 없다. 잡동사니를 넣어둔 상자와, 건축학 책들이 그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말끔히 정리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떠나기 전 미리 정리를 해둔 것 같은. 남아있는 물건은 책상과 책장, 의자 그리고 전원이 켜지지 않는 컴퓨터뿐이다. 묘한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것도 없으니. 쉽게 닿지 못하는 기억도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 점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괴물을 만드는 실험을 자행했던 자가 뭔들 못하겠는가.


 아, 알았다. 추측일 뿐이었으나, 나는 서늘한 기운이 온 몸에 감도는 것을 느꼈다. 우선 이 사실만이라도 동료들에게 알려야……. 아 참, 문이 잠겨있다.


 문은 아직도 열리지 않는 건가? 싶어 다가가려는 찰나, 괴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와지끈 하며 무너졌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것은…….




◆,♥ 1. 2013년 12월 24일 시간불명. 아가리 밖.

 진혁은 고개를 든다. 하늘 위에 허망히 떠있는 달이 보였다. 밖으로 나온 건가? 안도감이 들기 이전에 온 몸이 욱신거렸다. 무언가에 부딪힌 듯 한 느낌에 몸을 살펴보니, 옷은 여기저기가 헤진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바깥에 나와 있는 상황에 옷과 몸도 이런 상태라니, 진혁은 짜증이 솟구쳤다. 에단 녀석, 절대로 용서 안 할 테다. 그는 애꿎은 에단에게 성을 내며 분을 삭이기로 한다.


 이스티의 몸은 진혁보다는 나았다. 다친 곳도 없었으나, 그녀는 아직도 주변이 까맣다. 고개를 들면 달이 보이는데 주변에는 끝이 없는 어둠뿐이다. 어둠이 마치 이스티를 빙 둘러싸고 노려보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겁을 먹는다. 몸을 웅크리고, 평범한 어린아이가 그러듯이, 고개를 파묻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도움을 요청한다. 제발 누군가 도와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게 꿈이면 좋으련만. 이스티는 주변의 어둠에 잠식되어 개가 짖는 소리가 멎었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다.


 진혁은 저 멀리 어둠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다. 직감으로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알아차린 그는 정신없이 달려가 층층이 쌓여있는 어둠을 뜯어낸다. 어둠은 끈질겼지만, 그렇다고 규격 외의 힘을 이길 만큼 튼튼하지는 않았다. 흩어진 어둠은 그것이 마치 생명체라도 된 듯, 스멀스멀 기어가 병원 속으로 들어간다. 대부분의 어둠을 뜯어내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이스티의 손을 잡아끌어 꺼낸다. 이스티를 구하자 그나마 남아있던 어둠도 사방으로 흩어져 뽈뽈뽈 병원을 향해 기어간다.


 이스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눈가는 벌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용케도 참는다.

 진혁은 그런 이스티의 이마에 작게 딱밤을 날린다. 이스티는 짜증이 난다는 듯 그에게서 떨어져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진혁 또한 시름을 덜은 듯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가 그와 이스티에게 무서운 속도로 다가옴을 발견하고는 초월적인 공포감에 압도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만다.


 이스티는 눈을 감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제는 끝인가 싶었으나, 그 소리를 뒤따라오는 것은 적막과 고요뿐이었다. 이스티는 부들부들 떨며 눈을 뜬다. 그 앞에는 익숙한 모습의, 검은 머리를 갖고 있는 여성, 한 손에는 거대한 도끼―할버드라고 그녀가 말했던 기억이 있다.―를 괴물의 머리에 꽂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서있다.


 "나는 엘프를 구하려고 했는데 덤이 끼어있네."

 에이벨이 태평하게 말했다.

 마치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방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듯이.



Joker. 2013년 12월 24일 10시 25분.

 에이벨을 부른 것은 명희였다. 연줄도 없는 여자가 나를 왜 부르나 했더니, 보수는 제대로 쳐줄 테니 엘프 여자아이의 몸을 보호해 줄 수는 없겠느냐는 부탁을 해왔다. 엘프라는 단어에 덥석 수락을 했는데, 설마 지켜야 할 대상이 이 여자애였다니. 에이벨은 한숨을 쉬며 그녀와 일행이 병원 안에 들어갈 때부터 이스티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병원 안에서 이상한 개들이 울부짖기에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주변은 어두워져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숨을 쉬며 이 현상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도중, 원장실이라는 곳만이 어두워지지 않았기에 그곳의 문을 열었을 뿐인데, 서서히 어둠은 사라지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병원의 밖에 나가있게 되었다. 잠시 병원의 안을 살펴보고, 아직 안에 있는 둘이 안전한 지 확인하는 사이 거대한 개의 머리가 달려들었기에 그녀답지 않게 당황하여, 혹은 두근거리며 도약해 개의 머리를 찍어 누른 것이었다.


 "저, 명희 언니는?"

 이스티의 물음에 에이벨은 병원 건물을 쓱 흘겨보며 답했다.


 "지금쯤 내장 해체중일거다."



♠◆♥ CLIMAX. 2013년 12월 24일 10시 25분부터 11시까지. 아가리 밖.

 윤견호를 피난시키고(윤견호는 어쩔 도리 없이 차 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병원 안을 있는대로 헤집어놓은 명희는 내부가 조용해지자 한숨을 쉬며 병원을 빠져나온다. 윤견호에게서 들은 말이 조금은 충격적인지라, 우선은 그 사실부터 동료들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마침 명희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혁과 이스티가 다가온다. 괜찮다고 안심시킨 뒤,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며, 이 병원의 주인은 개들을 있는대로 모아 암흑물질(명희는 이 단어를 쓰면서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로 만들어 건물의 벽에 파묻었다고 한다. 내부는 완벽히 정리를 끝냈으며, 이제 곧 외부의 폭주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했다. 이스티는 전투태세를 취했다. 겁을 먹지는 않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진혁은 싸울 무기가 없어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건물을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진혁에게 명희가 만들어준 무기는 거대한 방망이로, 내부로부터 못이 솟아나오는 과격한 디자인의 물건이었다.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으나, 그렇다고 쉽게 휘두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휘두르냐고. 진혁이 따지자 명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애인 휘두른다고 생각해요." 라며 그의 입을 봉했다. 아무튼, 진혁은 짜증을 풀 기회가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채 병원을 노려본다. 병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많은 촉수가 솟아나오더니 제각기 강아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스티는 그녀의 옆에 서는 에이벨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는 작게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을 들었는지, 에이벨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피식, 소리만으로 웃는다. 이스티는 수많은 강아지들을 노려보다가 한 강아지를 향해 불덩이를 쏜다.


 그것을 신호삼아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방망이를 휘두르자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개들이 뭉개졌다. 더군다나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방망이의 관성을 이용하여 적은 힘으로도 파괴적인 힘을 낼 수 있고, 움직이면서 공격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진혁은 처음 다루는 무기가 마치 자신이 애용하는 무기인 양, 신나게 휘둘러댔다. 어느새 병원의 벽면이 보이자 진혁은, 이 방망이는 이것을 위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온 힘을 실어 냅다 벽을 후려친다.


 벽면이 무너지자 폭주는 더 심해졌다. 명희는 끊임없이 수많은 동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상징인 검은 개는 물론, 가족들이 사용하는 새들과 벌레들, 하늘을 떠다니는 해양생물들과 뱀들을 만들어내 공격을 막아내고, 괴물들을 하나하자 죽여 간다. 건물을 완전히 부수면 끝이 나지 않을 듯싶다는 생각이 들자, 명희는 만들어낸 동물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언젠가 아빠가 그러했듯,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여 거대한 범고래를 불러낸다. 모비 딕 주니어. 명희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보고는 건물을 가리킨다. 그것이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들어 지붕을 무너뜨린다.


 폭주는 점점 더 심해져 강아지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예사 속도가 아니었다. 이스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법은 최대한 다 써보았지만 이것들을 막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한탄을 한다. 끊임없이 불덩이를 쏘고, 활활이 등의 소환수를 불러내도 역부족이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에이벨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높이 던진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이스티는 망연히 병원을 바라보다가, 빛이 꺼지지 않는 곳, 원장실을 발견한다. 저걸 부수면. 이스티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무자비한 화염방사를 원장실에 퍼붓는다. 원장실은 그 형체가 남지 않고 새까만 재가 되어버려, 불어오는 밤바람에 날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강아지들의 공격도 멎었다. 아니, 병원이 완벽하게, 다시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후일담. 2013년 12월 25일. 00시 10분. 눈꽃 종합의원.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 라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을 듣고 병원의 벽에서 등을 떼 그들을 바라본다. 명희는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근 일 년을 같이 일한 터라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라모는 손에 들린 쇼핑백을 명희에게 건네주고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그들을 지나쳐간다. 그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더 편했다. 저들이 임무를 마쳤다는 것은 견호도 보고를 하러 돌아왔을 터. 필구는 일을 하느라 아직 그곳에 있을 것이다.


 라모는 휴대전화를 들어 필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을 끝냈나?"

 "아직입니다. 곧 끝납니다."

 "니 전에도 그래놓고 밤 샜던 거 아나? 그니까 좀 일좀 제때 제대로 해두라고 했나 안 했나?"

 "저 그게.."

 "됐고."

 라모는 변명은 관심 없다는 태도로 화제를 전환했다.

 "견호는 왔나?"

 "네. 왔습니다."

 "뭐 물어보더나?"

 "아니요. 물어보는 것은 없었습니다."

 "다행이네. 병원 원장을 죽인게 니라는 건 갸하고 얘기하면 금방 들킬 테니까 조심해라. 갸는 아직 그리 더럽지는 않아서 고발한다고 지랄발광을 떨지도 모르거든."

 "그렇게 된다면.."

 "죽일라고? 무섭네 필구~ 그냥 갸도 순응하게 할 끼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뿐이야. 그럼 내는 끊는다. 수고."


 주머니에 전화를 집어넣은 라모는 달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기분 나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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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날이었다. 평일인 것도 한 몫 했는지, 카페에 손님은 없었다. 슬쩍 둘러보니 부채질을 하거나, 선풍기 앞에 멍한 표정으로 서있거나, 에어컨 앞에 서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익숙했다. 매일같이 보는, 편안한 얼굴들. 제각기 그 정도는 다르지만 더위로 인해 적잖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스티가 있는 부엌은 더 덥긴 했지만, 그래도 굳이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작은 몸으로 커다란 냉장고 속을 뒤져 얼음이며 수박, 사이다 등을 들고 낑낑거리며 조리대로 옮기는 것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접시 가득 먹음직스러운 화채와, 반짝이며 빛나는 빙수가 담겨있었다. 빙수 위에는 수박이 작은 조각이 되어 올려 있었다. 이스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접시들을 하나하나 나눠주었다. 모두 화채와 빙수를 반기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마지막 접시까지 나눠주고 난 뒤, 기지개를 킨 이스티는 제 몫을 먹기 위해 조리대를 보았으나 남은 것은 슬플 정도로 내부가 해체되어있는 수박 껍질과, 과일 통조림, 그리고 텅 빈 얼음통이었다. 이스티는 잠시 그것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는 듯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정리했다.


 일을 끝내고 나니 이마며 얼굴, 등에도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름 강력한 냉방력을 자랑하는 에어컨의 바람은 부엌까지 닿지 않았다. 이스티는 개수대의 물로 얼굴을 씻고, 얼굴에 흐르는 물은 앞치마로 닦았다. 앞치마를 은 이스티는 부엌에서 나왔다. 에어컨 바람이 강한지 명희는 담요를 덮고 있었다.


 이제 좀 쉬나 싶었으나, 그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빈 그릇들을 들고 부엌으로 나른 이스티는 개수대에 쌓인 접시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결국 설거지를 끝마친 이스티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이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졌다. 손에 묻은 물기를 옷에 아무렇게나 닦으며 이스티는 제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들고 욕실로 향한다.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닦았다. 냉방이 되어있을 리 없던 방의 공기는 후텁지근해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한 뒤, 선풍기를 틀어 바람에 머리를 말린다. 원래 같았으면 드라이기를 썼겠지만, 뜨거운 바람만 나오는 드라이기를 이 날씨에 쓰는 것은 자살행위이리라.


 이스티 외에는 아무도 없는 방에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덥고 지치고 불쾌한 마음을 가득 안고, 이스티는 침대에 누워 잠시 잠을 청한다.


 다음에는 누구에게라도 도와줘. 라는 말을 할 수 있길 바라며, 아직은 서툰 여름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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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에고디퍼의 쉬는 시간, 모두를 불러 모은 퀭한 눈빛의 에단은 성취감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종이를 펼쳐놓는다.


 ♠-에단 레이먼드, 김명희, 하늘봄

 ◆-하진혁, 첸, 한부리

 ♥-이스티.R, 네이비, 하늘빈

 ♣-저스티니안 덴버, 키리에 엘레이손


 J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이를 바라보는 것을 쓱 둘러본 에단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설명을 시작한다.


 "나를 포함해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임의로 표를 짜둔 거야. 이렇게 나눠서 배치하면 임무하는 팀 나눌 때 효율적이지 않겠어?"

 "적재적소라는 이야기에요?"

 부리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단. 만년필의 뚜껑을 연 그는 스페이드에 동그라미를 치며 설명을 이어간다.


 "스페이드. 단일행동은 어려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나 동행이 필요. 주로 서포터를 하는 역할이거나 백업이 필요한 포지션이야. 예를 들어서 나의 경우엔 1대 1이 아니면 불리하니까. 김명희의 경우엔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서포트인 쪽이 더 든든하겠지. 늘봄이는 저격이 아니면 불리하니까. 스페이드 조. 라고 해도 되고 인텔리계층이라고 불러도 돼."

 "겨우 이런 거 설명하려고 부른 거예요?"

 "겨우 라니. 이게 얼마나 획기적인 발명인지 넌 모를 거다."

 명희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는 에단이었다.


 "다이아몬드. 단일행동 가능. 어쩌면 단일행동이 유리할지도 모르나 지속적인 지시가 필요. 진혁이는 제외하더라도 저기 명령이 떨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일 못하는 둘 있지? 아무튼, 게임으로 따지면 딜러겠네. 아니면 탱커? 잔챙이 처리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어 보여서 골랐어. 진혁이는 힘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고, 부리는 시키면 뭐든 잘 하니까. 첸은 설인이고. 명칭은 다이아몬드 조. 아니면 깡패."

 "죽고 싶냐."

 "살려주라."

 진혁의 날카로운 시선에 에단은 키득거리며 웃는다. 하트에 동그라미를 치며,


 "하트. 단일행동 불가능. 전투경험이 부족하고 폭주의 가능성이 있으니 주변에서 쿨다운을 해줘야함. 이쪽은 원거리 딜러라고 하면 될까? 단일 전투력으로는 독보적인 녀석들이긴 한데 하늘빈 쟤는 다루는 물건 자체가 위험하고, 이스티는 다치면 위험하니까. 네이비는 인간의 상식이라는 게 부족하잖아."

 "인간의 상식을 알아서 도움이 된다면 에디에게 당장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서라. 그보다 너 계속 에디 에디 하니까 신경 쓰인다고. 아무튼, 이 셋은 주변에 누군가가 있어야 돼. 다이아몬드나 스페이드가 도움이 될 걸. 명칭은 하트 조. 아니면 어린애들."

 "……어린애 아니야."

 에단은 대답대신 웃는 것으로 위기를 넘긴다.


 "클로버. 단일행동 가능. 전투경험 출중에 단일행동을 해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역할. 커맨더 내지는 어쌔신일까. 아무튼 혼자서도 잘 하는 둘. 저스티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이고, 키리에는 암살자니까. 명칭은 클로버 조. 내지는 무서운 누님들."

 "자기, 명칭이 너무 대충 같은데?"

 "뭐, 아무래도 좋잖아."


 "그 다음은 J인데. 이건 상정 외의 인물. 메모리 같은 부외자 내지는 정부 쪽 녀석들이라고 정해놨어. 이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때?"


 어느새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은 실망이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내가 이것 때문에 밤새 고민했는데 그러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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