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준비물이 필요해.
폭신한 이불, 편안한 베개. 근심과 걱정, 불안이 없는 뇌. 이 세 가지뿐이지. (준비물이 간단하지 않다는 소린 말아. 그 시점에서 이미 탈락이야.)
폭신한 이불로 몸을 감싸, 베개 위에 네 완벽한 뇌를 얹어. 그리곤 천천히 눈을 감는 거야. 눈앞에 뭐가 보여? 아, 이 표현은 아귀가 맞지 않는군. 눈꺼풀 안에는 뭐가 보이지? 굳이 대답을 하려고 입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빡일 필욘 없어. 뭣보다 눈은 절대로 깜빡이지마. 너는 위대한 여행의 시작점에 선거야. 망쳐서는 안 돼. 그러니 눈은 절대로 깜빡여선 안 돼. 알겠지? 좋아. 그럼 다시 앞을, 내 말은. 눈꺼풀 안을 보는 데에 집중하자. 뭐가 있지?
문. 그렇지. 바로 문이야.
돌로 된 커다란 문, 사실은 저게 돌로 만들어진 것인지 딱딱하게 가공한 플라스틱에 색을 입힌 것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과 고도의 기술을 들여 만들어낸 철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어둠 속에서 육안으로 확인하기에 그것은 돌로 된 문이라고 하는 게 어울려 보여. 문 위에는 수많은 무늬들, 사람들이며 동물들이며 식물들이며… 그 외에도 불이라든지 물이라든지, 태양과 달과 별과 구름과 행성들도 눈에 띄네. 사실은 문 위의 것들을 전부 묘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려. 더 중요한 건 우린 아직 모험을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거야.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문 위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누가 관심이나 있을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상상해 보라고 하자고. 가끔은 눈으로 보는 것 보다 머리를 통해 보는 것이 더 현실에 가까운 법이니까. 아무튼, 너는 문 위에 손을 얹어. 네가 덮은 이불 밑에서 꼼지락대는 손을 정말로 뻗을 필욘 없어. 그냥 문 위에 손을 뻗는다고 생각만 하면 돼. 그러면 어렵지 않게 차가운 돌문의 감촉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닿았네. 그렇지? 네 몸에 타오르는 한기를 느껴봐. 사실은, 그렇게 차갑진 않을 거야. 차가웠다간 잠에서 깰 테니까. 웅장한 돌문은 사실 그렇게 무섭거나 차갑지 않고, 손을 가볍게 올리는 것만으로 아무런 소리 없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해. 열린 문 너머에 뭐가 보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이제 안으로 들어가 봐. 저 새카만 어둠 속으로. 겁을 먹지는 마. 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저 문 너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모두 널 위한 일이니까.
열린 문 안으로 조심히 들어오면 슬쩍 뒤를 돌아봐야지. 짜잔, 문은 온데간데없어. 애초에 문이 있었던가? 그것도 나는 기억나지 않네. 그렇지만 지금은 문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지. 조금 더 걸어 나가 봐. 뭐가 보여? 그러니까 지금, 너는 뭘 해?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이건 네 꿈속이야. 네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지. 축하해. 드디어 성공적으로 잠에 들었어. 너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네 눈앞을 뒤덮던 광막한 어둠 속에서 넌 눈앞의 어둠이 일렁거리는 것을 느꼈을 거야. 그리고 그런 것들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꿈의 복판에 놓였겠지. 인과율을 벗어난 사건들과 상황을 겪으며 너는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겠지만, 아침에 꿈에서 깨어나면? 너는 그것들 중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할 거야. 운이 좋으면 하나 정도 건져낼 수 있을까. 그마저도 네가 갑작스레 기억과 상상을 엮고 접합하여 만들어 낸 가짜 이야기일 뿐이겠지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지. 지금 너는 꿈을 꾸는 것과, 잠들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네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상냥한 목소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 불면증이나 수면장애를 어떻게든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상상속의 목소리는 이만 자리를 비워야겠어. 좋은 꿈을 꿔. 내일 밤에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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