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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주 동안 루이스 맥도먼드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잔뜩 벌어졌다. 배우로서 살기를 그만두고 무대 연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몇 년 동안 몸을 붙이고 집처럼 지내던 극단을 떠난 것 까지. 자신의 영역은 여기까지라며 그어놓은 선을 밟는 것으로 모자라 선 전체를 무너뜨리고 영역을 확장시키는 시기에 들어선 것이라고, 루이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 넣었다. 10년은 넘게 쓴 두꺼운 일기장은 지면이 부족할 때 마다 새로 페이지를 덧대어 그 크기를 무서울 정도로 키워놓았으며, 안에 적힌 내용들은 남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자신의 속마음이나 제정신으로 읽기는 힘든, 고등학교 때 끼적거린 단편 소설과 시 따위 등이 적혀있었다. 사이사이 스크랩해둔 종이들은 주로 친구들과 함께 주고받았던 쪽지—다양한 글씨체가 작은 종이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 어느 순간보다 그 때가 더 즐거웠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나 수줍게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런 것들은 심심찮게 뒤적여 볼만해서, 그는 제 인생에 두 번은 없을 거라고 확신을 가질 정도로 격동적이었던 한 주를 돌이키며 잠깐 추억에 빠지는 즐거움을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그 때 까지 루이스 맥도먼드는 알지 못했다. 하이스쿨 첫사랑과 나눈 편지를 읽을 때 까지만 해도 루이스는 웃는 표정이었다. 졸업 댄스파티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던 사진을 발견했을 때 까지만 해도, 아우우, 같은. 기분 좋은 감탄을 내뱉으며 만면에 미소를 그리고 있다가 때가 되면 일기장을 덮으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지난 일주일동안 생겼던 모든 일들을 잠깐 잊을 정도로 과거를 추억하는 일은 루이스에게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으며, 그리하여 누군가 그에게 남겼다가 읽지 못하고 일기장 사이에 얼기설기 꽂아두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에는 잠깐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에게 솔직해지고 싶었어. 너무 늦게 돌아서 왔지만, 정답은 너였던 거야.
미련하다고 비웃어도 달게 받아들일게. 나를 무시해도 괜찮아.
그래도, 마지막까지는 기다리고 싶어.
7일 까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언제든 날 보러 와줘.
-사랑을 담아서, 너의 맥플라이가』
딜턴 맥플라이의 서체는 그 순간 이후로 단 한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쪽지를 세 번째로 읽고 나서 고개를 번쩍 들어 달력을 쳐다봤다. 마친 6일이 끝을 맞이하고 7일이 되어가는 순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때를 맞춰 가볍게 울렸다. 루이스는 급하게 제 옷가지를 챙겨 입은 뒤 구두를 고쳐 신는다. 외투를 여미는 순간 그의 오래된 코트는 드레스로 변하고, 칙칙한 짙은 갈색의 구두는 어느새 유리로 변한다. 신데렐라와 바통터치를 하듯, 루이스는 빠른 발걸음으로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빠져나가 차가운 밤거리로 들어선다.
모든 시곗바늘이 그에게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 조금 미친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맥도먼드는 자신을 비추는 한 밤 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로 오르고 있었다.
*
Replay, Time Machine :: 03-04
*
“… 그렇게 제 어머니 루이스 맥도먼드와 아버지 딜턴 맥플라이는 부부가 되어 시애틀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용맹한 어머니랑 세심한 아버지는 서로 싸우는 일 없이, 사이좋게 가정을 일구시고 그 결과 네 명의 아이들이 생겼습니다. 첫째, 그러니까 가장 큰누나 베로나 베로니카 맥도먼드 맥플라이는 하룻밤 사이에 산을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구요, 둘째 누나 메이지 메로피 맥도먼드 맥플라이는 이 학교 학생들이랑 선생님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미인이라고 해요. 제가 보기엔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저의 영원할 친구, 헤레이스 헬레나 맥도먼드 맥플라이는 아마 작년 이 순간에 이 발표를 했겠죠. 도와주던 게 기억이 나네요. 마지막으로 저, 체스터 콜린 맥도먼드 맥플라이입니다. 가족들은 내가 아빠를… 아니, 아버지를 닮았다고 그러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누구도 닮은 것 같지 않아요. 음, 저는 누구도 닮지 않고 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혹시나 하는 얘기지만 동생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집이 더 좁아지니까요. 이상, 체스터 콜린 맥도먼드 맥플라이의 가족 소개였습니다.”
열 살짜리의 발표 치고는 제법 괜찮은 구석이 많은 발표였다. 발음도 또렷했고, 발성도 괜찮았으니까. 목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지 않고,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소심한 막내 콜린의 발표가 그랬다면 더욱 더 가산점을 주고 싶은 법이다. 모처럼의 휴일에 부모님의 손에 잡혀 끌려온 베로나 맥플라이는 그런 생각이나 하였다. 옆의 두 사람은 감동을 한 듯 기분 좋게 웃고 있었으며, 자기 자리로 후다닥 돌아가는 막내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베로니카는 ‘아무리 막내라도 그렇지 너무 좋아해 주는 거 아니야.’ 같은 투덜거림을 품었으나 굳이 티내지는 않았고, 애써 웃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하긴, 언제는 또 자기 자식한테 박했다고.’ 이어지는 다음 학생의 발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베로니카는 원체 순하고 낭만적인 부모님에 대한 불평이나 잠시 늘어놓았다. 곧 수업이 마치고 콜린이 웃으며 다가올 때 즈음에, 베로니카는 털어놓은 불만들을 한 순간에 불사르고 몸을 숙여 다가온 남동생을 번쩍 안아들었다. 콜린은 순간 놀라 꺅 비명을 질러댔으나 이내 웃으며 그에게 몸을 기댄다. 평소에 안 하던 짓들을 한다며, 너희도 우리만큼 유난이라는 부모님의 말은 막내 동생의 웃음소리에 묻혀 대답을 할 필요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그 순간을 기준으로 동생들에게 늘 엄격했던 베로니카가 막내 콜린에게는 조금 누그러지게 되었던 거라고, 베로니카는 회상한다. 늘 콜린을 떠올릴 때에는 그 웃음소리, 놀라서 내지르던 비명소리 이후 개운함과 즐거움이 섞인 것으로 들리는, 그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함께 따라왔으므로. 그리하여 그가 상담을, 그것도 정신과에서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앞뒤 따지지 않고 상담의의 전화부터 캐묻게 되었다. 무신경하게 이어지는 신호음이 지독하다.
무신경하게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가 지독했다. 콜린은 여기저기 불이 붙어 타오르는 광경을 보고 그만 발이 굳어버렸다. 그러고 보니까, 신고를 했어야…. 정신을 차린 뒤에는 용의자를 놓친 이후였고, 텅 빈 길에 혼자 서있던 콜린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해 주변을 둘러보기만 한다.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잘 아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뒤를 돌아보면 어디가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어느 길이 맞는 길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곧 바로 뒤에서 귓전을 때리는 사이렌 소리에 눈을 깜빡인 맥플라이는 화마로 잠식된 도시로부터 달아나듯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가 방화를 저지른 것이 아니고,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쫓았으나 결국 놓치고 말았다고 경찰을 설득시키는 일 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기꺼이 달려온 첫째누나를 대하는 것이었기에 콜린은 베로나가 쥐어주는 커피 잔의 모서리 부분을 엄지로 쓸기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베로나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콜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새 그 뜨거운 커피를 다 마신 뒤 빈 종이컵을 주먹으로 꽉 쥐어 우그러트린 누나를 흘끔거리며 보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뱉은 것은 콜린이었다.
“여긴 또 어떻게 왔어.” 가족들에게 소식이 전달되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먼저 전화를 걸어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던 콜린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하기야, 인생이 잘 풀리는 적이 있었던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네 제일 큰누나가 소방관이라는 사실은 그새 또 까맣게 잊어버렸냐.” 퉁명스런 목소리로 답하고는 베로나는 급하게 재킷 주머니를 뒤적인다. 담배 있어? 없어. 하여간 도움이 안 돼. 같은 식의 대화를 끝으로 잠시 아무 말 없는 사이 콜린이 쥔 잔에서는 흰 김도 더 이상 오르지 않게 되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해?” 둘 사이에 뿌옇게 내려앉은 침묵을 버틸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는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 이번에 침묵을 깬 것은 베로나였고 갑작스런 질문에 콜린은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해. 하기는.” 예를 들면 사람들은 얼마나 죽거나 다쳤을지, 재산 손해는 얼마나 심각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긴 했으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귀결되는 부분은 단 한 지점이어서, 애초에 생각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았겠다고 판단하여 뱉은 답이었다. 콜린의 답에 베로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곧 따라오라는 신호임을 알아차린 콜린은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옆에 내려두고 베로나의 뒤를 밟았다.
콜린의 기숙사로 향하며 베로나는 몇 번이고 집으로 가지 않아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콜린은 다섯 번째로 “누나네 집에는 애들도 있고, 부모님한테는 갑자기 찾아갔다가 무슨 질문 폭탄을 받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 고 대답하는 것을 포기하고 가지 않을 거라고 언성을 높였다. 조금 큰 소리에 베로나는 전방을 주시한 채로 콜린을 한 대 쥐어박기는 하였으나 학창시절에 벌어졌던 수많은 싸움과 다툼에 비교해보았을 때 콜린은 쥐어박는 것 하나로 끝났다는 게 잠깐 놀라웠고, 결국 더는 투덜거리지 않고 차창 밖을 내다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화재가 있었음에도 도시는 고요했음과 동시에 살아있었다. 어딘가에서 누구는 잃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적에 다른 대부분의 인간들은 앞으로 뭘 하고 뭘 가질 지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로등 사이사이 드리워진 검정색을 세다가 기숙사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것이 기억난다.
인사하기 전, 베로나는 차에서 내려 콜린을 한 번 끌어안아 주었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누나에게 안기는 기분은 늘 겪을 때 마다 기묘하고 어색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최근에는 더더욱.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은 그리 춥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허공에서 팔을 잠깐 휘적거리던 콜린이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베로나는 떨어졌고, 이어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찬 다음 차로 돌아갔다. “좀 건강하게 살아. 걱정 좀 그만 시키고.” 차문을 열고 베로나가 토해내듯이 말했던 것을 떠올릴 때 마다, 콜린은 다시금 그가 움직여야 할 이유를 찾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떤 긍정적인 방향이나,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의지가 없이. 적어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어떤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의욕 같은 것들. “너 스스로 나아질 방법을 찾아야지. 우리는 평생 너 못 챙겨줘.” 매정하게, 그리고 이기적이면서 독단적으로, 베로니카는 그 말을 남기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개인 상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콜린은 로렌스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그림들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투덜거리며 한 편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군복무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앞이었던 그 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 멍하니 삼십분을 계속 멈춰 서서 서있던 날들도. 그 때 먼저 손을 잡아끌어준 건 헬레나였지. 먼저 말을 걸어줬던 건 메로피였고. 마지막으로 베로니카는… 문을 열어줬다. 그 사이에 부모님이 다가와서 안아줬던 것도 기억이 나고. 콜린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금방 시선을 돌렸다. 잠깐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는 로렌스의 사과에는 “빈 시간 동안은 시간 안 흐른 걸로 치는 거 맞죠.” 같은 말이나 할 뿐이었다.
첫 번째 상담은 제법 부드럽게 잘 흘러갔다. 로렌스는 콜린이 적당히 마음에 들어할만한 인물이었으며, 편하게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제법 기분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담 세션 동안 굳게 핸드폰을 킨 맥플라이는 금방 심각해져 급하게 상담실을 뛰어나가다가 벽에 한 번 머리를 박고 넘어진 뒤 다시 일어서고 마는데, 콜린의 머리에 부딪혀 떨어지는 액자에는 안중도 없이 그는 부재중 전화 목록과 받은 메시지 목록을 올려보다가 급하게 전화를 건다. 이마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하기야, 인생이 잘 풀리는 적이 있었던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해였다.
전화로 꽤 많은 대화—엄밀히 말하면 싸움에 가까웠다. 그것도 무척이나 치열한. (예를 들면: 누가 상담 같은 거 받으라고 했냐. 그게 나아지긴 하는 거냐. vs 스스로 나아지라고 하지 않았냐. 추천을 받아서 고려 해본 거다. / 남한테 등 떠밀려서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vs 내가 필요해 보여서 받는 거다. 나도 내 의사가 있다. / 전화는 왜 꺼놨냐. vs 세션 중에는 꺼놓는 게 예의 아니냐. / 공수교대 / 왜 이걸 이해 못 하는지 모르겠다. 주변 지인들도 종종 상담 받는다고 하지 않았냐. vs …….) 결론만 놓고 보면 베로니카의 패배였다.—를 거치는 동안 로렌스가 다가왔으며, 안 그래도 이 전투…전화가 끝마치면 목표를 바꿔 전투를 걸고자 했던 대상이 왔기에 베로니카는 전화를 바꿔달라고 말했다. 이후 짧은 대화 끝에, 로렌스는 맥플라이에게 전화를 돌려주며 말했다. “당신 걱정을 많이 하시네요. 유리 조각 대하듯 하시는데요.”
이후 베로나와 콜린은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 일로 두 사람이 데면데면해졌다기에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으니 무엇을 탓할 필요도 없지. 뉴욕에서의 일을 끝내고 휴가를 받은 콜린은 베로나와 그의 가족들에게 방문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베로나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 둘의 사이는 그 때 보다는 훨씬 나아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베로나, 베로니카는 콜린에게 있어서 무서운 누나였고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누나이기도 했다. 베로나가 보기에도 콜린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 콜린은 여전히 가족에 대해 또박또박 발표하던 열 살짜리. 자신이 시간제 강사를 그만두고 소방관을 할 거라고 가족에게 이야기 했을 때 우려하던 가족들 속에서 작게 박수를 치며 멋있다고 이야기 해준 열일곱 철부지였다. 2020년이 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으리라. 초인종 소리에 활짝 연 문 너머에는, 올해 첫날에 자신과 가족들에게 자신은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의젓하게 말한. 다 큰 어른인 콜린이 서있었다.
/04
현실 속의 영웅에 대한 낭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낭만은 곧 비극의 밑바탕이 되지 않던가.
영웅적인 인물은 얼마 가지 않아 현실에서 탈락되기 마련이다. 세계는 거대한 부조리로 움직이는 태엽 인형과도 같아서 부조리를 없애는 영웅이 오래 남아있으면 세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최후 앞에서 장엄한 대사를 뱉는 영웅을 보며 콜린 옆의 베로니카가 투덜거렸다. 메로피는 이 집에서 둘 뿐인 금발 머리카락을 괴롭히고 있었고, 헬레나는 콜린과 함께 TV 속 무대 위의 영웅에 잔뜩 집중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이미 보아 결말을 알고 있던 베로니카와 메로피는 이미 영화 내용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럼 계속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 메로피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헤어스타일을 찾은 듯 머리카락을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고 베로니카를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조용!!” 콜린과 헬레나가 험악한 표정으로 둘을 돌아보았기에 둘은 그저 웃으며 입을 다문다. 두 사람은 영웅의 최후에 집중하고, 남은 둘은 영웅의 최후를 지켜보는 둘에 집중했다. 박수소리와 함께 베로니카와 메로피의 큰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따라서 울려 퍼지는 지금 이게 웃기냐는 울음 섞인 두 사람의 비명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붙었다.
콜린이 베로니카의 집에 앉기 위해 베로니카의 열두 살 먹은 아들 조이와 열 살 먹은 딸 헤븐을 안아들고 어르고 달랜 뒤 선물과 용돈을 쥐어주어야 했다. 헤븐은 엘사는 졸업하고 안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조이는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의견을 매일아침 일어날 때 마다 베로니카와 그의 남편에게 한다는 소식을 들어 선물은 거기에 맞춰 준비해 주었더니 올해에도 또 제일 좋아하는 삼촌—굳이 따지자면 삼촌은 콜린 하나뿐이었기에 이런 타이틀이 의미가 없긴 하지만.—이 될 수 있었다. 선물 포장을 마구잡이로 뜯어낸 작은 악마들은 웃으며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아이들이 모두 들어간 뒤에야 지친 표정을 지어보였으며, 콜린은 느리게 기지개를 켜고 그의 표정을 발견한 뒤 가볍게 웃는다. 왜 그렇게 다 늙은 표정이야. 야, 나도 이제 오십이거든. 에이, 같이 일한 어르신들도 다 멀쩡한데 뭐. 너는 안 늙는 줄 아냐 이 화상아. 농담처럼 대화가 오가고는 베로니카는 콜린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괜히 묻는다. “힘들진 않아?”
힘들기는, 그야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총질도 해댔고 심란한 문제들 앞에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으며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콜린은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오니 좋다던가, 아니면 공항에서 마주했던 꼬마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울다가 울음을 그치던 많은 아이들에 대해서도. 사명감이 없으면 지속하기 어려운 이 일에, 그리운 단비처럼 성취감이 마구 쏟아지던 때였다. 그렇기에, “힘들지 않아.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제법 뿌듯한 얼마 안 되는 순간이야.”
콜린과 베로니카의 대화는 이전처럼 싸움으로 번지지도 않았고, 일방적이었거나 침묵이 가득하지도 않았다. 둘은 곧잘 과거로 넘어가 옛날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으며, 그 때 마다 베로니카는 큰 소리로 웃었고 콜린은 그를 잠깐 흘겨보면서 그게 웃을 얘기냐고 장난 식으로 따져 묻곤 했다.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남매의 대화가 끝이 난 뒤 콜린은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봐야겠다며 베로니카에게 손을 흔들었다.
“콜린,”
문을 열어준 베로니카는 콜린이 완전히 집안을 빠져나가기 전 그를 불러 세웠다. 콜린은 눈을 잠깐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본다. 내가 용건 먼저 말하고 이름 부르라고 하지 않았나. 누나가 이름부터 부르면 좀 무섭다고. 태평하게 말하는 콜린에게, 베로니카가 조용하게 응원했다.
“네가 한 선택들, 전부 맞지는 않았더라도 말이야…….”
확신과, 친애를 담아서.
“멋진 일들이었어.”
✂-
큰일났다... 06에 다 못 끝낼 것 같다...
타임머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쯤 나올까요?
그것은 다음 편에 계속....
아!!! 맞아 베로니카의 아들딸 조이와 헤븐의 이름은 민리님의 자캐들 이름을 살짜쿵 빌린 거랍니다. 건강하니 조이야 헤븐아.... 이름만 살짜콩 빌렸어요 다른 관계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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