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델핀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집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정신을 차려보니(이런 표현 또한 미묘하다. 정확한 언어를 찾기엔 이 현상 자체가 기이하여 그리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엘리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집에 서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엘리엇의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을 때였으리라고, 스스로 추측했지만, 확신은 없다. 테디에게 그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는 엘리는 마흔한 살의 모습인데도 일곱 살처럼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고모가 자주 드나들면서부터는 가족들이 좀 이상해지긴 한 것 같아. 멜리사도 처음에는 말리려고 했대.”

그 시점부터, 정확히는 관이 붉은 벽돌집의 다락으로 옮겨져 엘리엇이 집의 일부가 되었을 때부터 엘리는 집안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테디는 그와의 기억을 공유한다. 고모는 낯선 기도문을 읽었고 종종 십자가를 뒤집어 놓았으며 가끔은 가족들을 모아 둘러앉히고는 이상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언제나 상앗빛의 레이스 달린 천이 사용되었고, 몇 차례의 의식이 끝난 뒤에는 집안을 이루는 천이 대부분 상앗빛으로 바뀌었다. 상앗빛 커튼이 드리운 집의 창문은 바깥에서 보면 앙다물고 있는 입의 이빨 같았다. 고르지 못한 치열을 가진 집은 가족들의 의지에 따라 변하고 바뀌었다. 엘리엇은 불쾌하단 표정으로 제 장난감을 집는다. 팔이 부러진 플라스틱 티라노사우루스의 표정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티렉스를 제 옆구리에 끼워두고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테디는 그동안 다락의 다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초와 성냥이 있어야 해. 아니면 적어도 불을 켤 수 있는 거. 여긴 너무 어두워. 바닥을 조심조심 살피며 걷는 테디의 등 뒤로 비틀즈의 Yesterday가 들려왔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사랑스러운 동생은 원하는 것 찾았다는 듯, 떡갈나무 관의 널찍한 모서리 위에 작은 라디오를 올려둔다. 라디오는 오래되었고 긴 기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것처럼 소리를 뱉어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엘리엇이 말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이 노래가 아니잖아.” 테디는 짐짓 날카로운 투로 대꾸하고는 기어이 향초와 성냥을 찾아내 엘리에게로 돌아갔다. 엘리는 잠깐 우울한 표정을 흉내 내더니 깔깔 웃으며 잘생긴 얼굴이 더 보기 좋게 주름을 패어냈다. “역할을 바꾼 건 이제 제자리에 돌려놓자는 거야?” 테디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런, 테디.”

엘리엇은 좀 더 놀고 싶을 때마다 그랬듯, 인상을 작게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팔짱을 낌으로써 자신을 무장한다. 어떤 말도 듣지 않을 테니 내 말을 들어달라는 일종의 시위였으나 지금 테디에게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역할 바꾸기 놀이는 끝나야 하고, 서로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젠 놀릴 사람도 없지 않나. 테디의 주장에 엘리엇은 결국 팔짱을 풀어내며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 놀이는 이걸로 끝이야.”

엘리는 잠시 틈을 주고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내 취향 대부분은 형의 취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건 이해해 줘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테디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면서 물었다. 아직 엘리엇의 존재가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엘리는 죽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사랑스러운 웃음을 내비치는 존재는 물론 엘리였지만, 동시에 엘리는 떡갈나무 관 속에서 부패하여 뼈만 남아있는 상태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엘리엇의 뼈와 혼뿐이다. 그의 살과 피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고 무슨 수를 써서도 되찾을 수 없다. 테디는 그 부분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나한테 써준 일기.”

엘리는 설마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라며 추궁하는 눈빛으로 테디를 바라봤다. 테디는 한 박자 늦게 깨닫고는 그의 시선을 피한다.

뭐야? 너무해!” 엘리엇은 괜히 빽 소리를 질렀다.

그걸 정말로 읽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

테디는 조심스레 대꾸했다.

읽었다기보단 가끔 느껴졌어. 테디 네가 나한테 건넨 말들이나, 네가 나에 대해서 한 생각, 타인과 나눈 내 이야기, 내 이야기와 함께 있는 네 이야기 같은 것들.” 엘리엇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그는 이 다락방의 위태로운 마룻바닥에 누워 그대로 잠이라도 들 듯 평온한 표정이다.

테디, 네가 날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걸 전부 느낄 수 있었어.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내겐 당연한 일이야.”

…….”

가령 네가 날 미워했을 때도,”

테디는 엘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네가 날 잡아먹고 싶어 할 때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어. 넌 그때마다 울더라.”

시끄러워.” 테디의 말끝이 날카로워진 것을 느끼자 엘리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 나는 네가 날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게 얼마나 좋았는데. 테디,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 줄 알아?”

엘리엇은 몸을 일으키고, 테디에게 다가갔다. 그는 뒤에서 테디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그의 어깨에 제 뺨을 얹은 채로 가만히 사랑스러운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테디는 직전에 엘리엇이 한 말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기느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낮은 숨만 흘렸다. Yesterday 이후 재생되는 노래는 Yellow Submarine이었다. 그러나 나른하고 평화로운 노랫소리도 멀어지고 적막이 감도는 다락의 한구석에서는 두 형제의 조심스러운 숨소리만 공연히 울려댔다. 테디는 엘리엇을 보면서도, 그리고 제 몸에 얹어진 그의 무게와 그의 향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가 이곳에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엘리는 죽었다. 여섯 살의 어느 가을, 비가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날에. 맨홀 뚜껑에 빠져서 머리를 부딪치고 그대로 추락하여 사망했다. 대처가 빨랐으면 어찌어찌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과정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는 없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테디는 엘리엇을 부정하지 못했다. 부정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감정이다.

질투는 추한 거야.”

엘리엇은 테디의 목에 코를 파묻으며 웃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엘리엇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질투는 달콤한 거야. 테디 너도 다른 사람의 질투하기를 바라잖아.”

엘리는 손을 뻗어 테디의 팔을 매만졌고, 그의 손을 덮었다, 손가락을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웠고 마치 갖고 싶은 장난감의 포장된 상자를 매만지듯 조심스러웠으며, 동시에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사한 사람이 되어서, 다들 널 질투하길 바라잖아.”

테디는 낮게 숨을 뱉어냈다.

어릴 땐 그랬지.”

지금은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저.”

이젠 왜 사는지조차 모르지?”

엘리엇이 그의 말을 가로챈다. 테디는 일순 말을 잃는다. 부드럽게 열렸던 집안의 모든 방문이 하나하나 닫히기 시작하며 매서운 소리를 냈다. 어떤 문은 지나치게 세게 닫혀 두 사람이 있는 바닥을 뒤흔들 정도였다. 엘리엇은 테디를 진정시키려는 듯, 그의 뺨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고 떨어진다.

찾고 있어.”

테디는 겨우 대꾸했다. 엘리는 찾았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낮게 웃는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테디는 엘리의 웃음이 각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끄러워지면 어우,” 라고 말하며 웃었고, 기분이 좋을 때는 온 얼굴을 접어가며 환히 웃었다. 타인의 말에 긍정할 수 없거나 그를 비웃을 때는 낮게 웃는 소리만 내곤 했고, 그럴 때마다 테디는 기민하게 알아차려 그와 말다툼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싸울 힘조차 남지 않았다. 집안의 모든 방문은 굳게 닫히고 단단히 맞물려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형체 없는 누군가가 복도를 지나다니며 문을 두드렸지만, 이 집에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둘뿐이다. 질투와 애정이 뒤엉켜 검은 곰팡이처럼 벽면에 얽혀있다.

어릴 적에는 너처럼 되고 싶었지. 그렇지만 전부 지난 얘기야.”

말을 마치며 테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어두운 공간을 밝힐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며 다락의 마룻바닥을 느릿느릿 걸었다. 엘리엇의 품에서 벗어나자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았어도 죽었어도 엘리엇은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기억만 하고 있던 게 선명한 실체로 나타났다고 해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느냐면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얄미웠으며,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구석이 있고, 사람이 그어놓은 선을 자연스레 무시하는 데에 도가 텄다.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보이곤 하며 양보를 할 때는 가끔 아쉬워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런 모든 요소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테디는 기억할 수 있다.

문득, 테디의 발에 무언가가 걸려 내려다보니 발치에 오래된 성냥 상자와 상앗빛 양초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테디는 몸을 굽혀 그것들을 주운 다음 엘리를 돌아보았다. 엘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느끼고 있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 수 있어. 집안의 방문을 모두 걸어 잠근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읽힐 수밖에 없어. 테디의 시선에 엘리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나 상아색 싫어해.”

가족들 때문에?”

엘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테디는 그 이유가 맞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낸다. 그래서 숨겨두고 있었구나. 테디는 그가 싫어하건 말건, 성냥을 하나 꺼내 불을 붙였고 양초를 밝힌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세워둔 다음, 은은한 빛에 의지하여 다락을 다시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엘리엇의 물건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가 살아있던 6년의 기간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들이 다락에 가득 담겨있었다. 그것들은 벽을 빼곡 채웠고, 바닥을 빈틈없이 막는 모양새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가족들은 왜 물건들을 여기로 옮겼을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꽉 닫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2층까지 올라왔으나 다락으로 이어지는 문은 절대로 두드리지 않았다. 무언가의 기척은 다락으로 이어지는 문 밑을 어슬렁거리더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테디는 어느덧 엘리의 사진이 잔뜩 쌓인 곳으로 갔다. 그가 태어난 직후 울고 있는 사진부터 보자기에 둘러싸여 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진, 테디와 함께 아기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는 사진 따위가 늘어서 있었다. 첫 생일,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리고 여섯 살……. 엘리의 생애는 수많은 사진으로 남았고 인화되어 실체를 가진 채 다락에 봉인되어있었다. 여섯 살의 비 오는 어느 날 엘리엇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테디는 사진을 아무렇게나 넘긴다. 일곱 살 생일이라는 풍선 글자들의 밑으로 웃고 있는 엘리의 모습이 보였다. 멜리사가 어렵게 그의 뺨 위로 키스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사진 속 남자아이의 눈빛은 엘리엇의 것과 똑 닮은 푸른빛이었다. 그건 이따금 붉은 광원 앞에선 회색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테디는 의아해하며 사진을 넘겼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엘리엇은 당당한 표정으로 학교 건물을 등지고 서 있다. 그의 옆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멜리사가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의 흰 여백에는 테디에게. 네 몫까지 열심히 학교 다닐게!’라는 내용으로, 삐뚤빼뚤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뭔가가 이상하다……. 고모는 죽은 애의 이름을 테디라고 기억했다. 테디는 제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알코올성 치매거나 노망이 들어 발생한 인지의 오류거나, 또는 괴이한 암시이리라고 생각했다. 집에 처음 온 날 테디는 자신이 죽어서 다시 리버풀에,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에 도착한 것인지 자문했다. 상앗빛 커튼을 걷자 창문에 맺히는 상으로 그런 의문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가족들의 장난이 고약하지?”

그제야 엘리엇은 테디에게 다가가, 온전한 형태와 무게를 지닌 채로, 사진을 쥐고 있는 테디의 손을 감싸 붙잡았다. 그는 테디의 손에 들린 사진을 빼앗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불쾌한 모독이라도 마주한 것 마냥, 그의 낯에는 언짢은 빛이 섞여 있다.

하지만 내가 진짜로 살아있었으면 정말 즐거웠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테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 눈앞의 또렷한 형체와 온도를 지닌 제 형제가 정말로 살아있는 게 아닌가?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었지? 만일 내가 죽은 게 맞다면, 나는 죽어서도 그를 질투했으리라. 살아있는 그를 질투하고 그의 생을 잡아먹으려 들었을 것이다. 죽어서도 추한 존재로, 괴담으로, 유령으로 남아 집을 떠돌았겠지. 닫힌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열린다. 그는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존재조차 믿기가 힘들었다.

다음 노래는 Let it be였다. 엘리는 라디오를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테디를 바라본다. 공포에 떨고 있는 그의 낯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열망하듯이, 조금 더 그가 흔들리기를 바라듯. 마침내 무너지는 순간을 기다리듯 그의 눈빛은 끈질긴 구석이 있다. 테디는 엘리엇의 손을 뿌리치고, 불이 붙은 양초를 집어 들었다. 녹아내리는 촛농이 손바닥에 닿아 따끔하고 뜨거운 감각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엘리의 묘비로 다가간다. 먼지 잔뜩 낀 비석을 손으로 닦아내자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투명한 비석만이 그 자리에 있다.

의심하지 마. 죽은 건 나야.”

이제는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조차 모르겠다. 엘리엇은 어느새 관에 누워있던 것인지, 떡갈나무 관에서 몸을 세워 앉아 팔을 걸치고 테디를 바라본다.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노래 가사가 둘 사이에 흐른다.

어쩌면 너일 수도 있어.”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폐쇄된 공간에 순식간에 바람이 불었고 테디가 들고 있던 양초의 불이 무력하게 꺼진다. 다락과 2층으로 이어가는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사다리가 펼쳐진다. 테디는 양초를 내려두고 열린 문으로 걷는다. 정사각형의 문 너머를 내려봤지만 불 꺼진 복도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시어도어는 복도의 불을 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복도 천장의 전등은 빛을 밝히는가 하더니 비명처럼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뱉으며 산산이 조각난다. 엘리는 여유를 잃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테디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어차피 이젠 아무런 의미 없는 거야. 누가 죽었든지 말이야. 테디.”

내가 죽었으면, 너처럼 되고 싶었던 나는 뭘까?”

테디는 울적한 목소리로 엘리에게 묻는다. 검은 구렁 너머에 조명이 서서히 들어온다. 붉은 웅덩이가 있었지만, 그 위에 누워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다리를 오르던 건 엘리였다. 어린 그는 고개를 들어 두 어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엘리엇과 시어도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작은 것에게 돌아가라고 입 모양으로 말을 건넨다. 마침, 밑에서 테디가 울음을 터뜨리고 엘리는 급히 뛰어 내려가듯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바닥에 뛰어내린 그는 붉은 웅덩이에 누워있다, 머리는 사다리에 부딪혔는지, 아니면 맨홀 입구에 부딪혔는지는 알 수 없다. 노란 우비는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지만 쏟아지는 비에 붉은 증거는 연신 씻겨 내려간다. 푸른 눈은 이따금 녹색으로 바뀌고,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 없어.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가 아니야.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서로 역할을 바꿀 수 있고,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았는지도 바꿀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해온 놀이잖아.”

이 놀이를 계속하자고 할 셈이야?”

테디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어왔다. 엘리는 고개를 젓는다.

너는 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런던의 방 두 칸짜리 플랫으로.”

엘리는 테디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는다.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부드럽게 숨을 쉬었다. 테디가 이 집의 마당을 밟을 때부터 나던 낯선 향은 리버풀의 것이, 에버턴의 붉은 벽돌집에 속해있던 게 아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고, 엘리는 그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테디의 집은 한때 붉은 벽돌집이었으나 어느 순간에는 블라이스였고, 지금은 런던의 방 두 칸 짜리 플랫이다. 테디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엘리 또한 이 집에 남은 애정이라곤 없었다. 그가 가진 애정이라곤 순전히 테디를 향해있다는 걸 자신의 형은 알까. 질투와 애정은 그 근원이 같았고 테디가 자신에게 질투를 쏟아붓는 만큼 엘리는 그를 사랑했다.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었던 유년기다. 시간이 뒤엉키고 집이 녹아내리는어쩌면 녹아내리는 것은 집이 아니라 두 사람일지라도이 순간이, 시점을 빼앗은 지금 이 순간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랑하는 형을 잡아먹을 기회임을 엘리엇은 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상관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날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델핀 가족은 105일부터 107일까지 3일간 시어도어 델핀의 죽음과 그의 생애를 추억하는 시간을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간다면, 나랑 같이 가. 혼자서 집을 걷는 건 이젠 싫어.”

엘리엇은 테디를 부드럽게 민다. 그의 몸 위를 덮듯 자신의 몸을 포갠다. 열린 다락의 문 밑으로 둘의 몸이 내리꽂혔다.

 

 

 

 

◆ 기본 안내사항
제목: 역할 바꾸기 놀이
장르: 고딕 호러
전체 분량: 95,068자
작업 기간: 20220502~20220524
개요: 마흔두 살의 테디 델핀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족과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상한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인가?

자작캐릭터 시어도어 "테디" 델핀 개인만족용 고딕호러 로그입니다. 본편을 한번에 올리기는 너무 길어서 분할해 올립니다. 편하게 읽어주세요. 각 편마다의 후기는 밑에 ▼

5. 엘리엇 후기
5편 플레이 리스트는 비틀즈의 Yesterday와 Yellow submarine, 그리고 Let it be 입니다. 상대적으로 좀 짧아요. 무엇보다 "형제" 라는 부분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 부분을 쓰면서 어라 약간 근친같나? 했는데.... 피를 나눈 자들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잖아요? 아닐 시 여러분이 맞습니다... 근친 또한 오래된 공포의 대상이라고 생각해보면

본래 규격대로 읽고 싶으면? 포스타입에서 읽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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