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플랫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기 위해 시어도어 델핀은 거울 앞에 선다. 괜히 멋을 내기 위해 맸던 넥타이가 목을 졸라대는 것 같았다. 그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신나게 드럼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조지 해리슨의 Got my mind set on you가 흘러나온다.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사랑을 하기 전 드는 돈과 시간에 대한 고민이 섞여 있는 신나는 노래는 테디가 그걸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알 수도 없었지만, 어느샌가 자연스레 좋아하고 있었다. 마치 제 취향이 아닌 남의 취향을 옮겨 받은 것처럼. 아무렴 뭐 어쩌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런던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까 괜히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10월 7일에 돌아가려던 일정은 어쩌다 보니 사흘이나 늦어져 10월 10일에서야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앞으로의 일정에 큰 차질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런던의 플랫으로. 거울 앞을 떠난 그동안 깨끗하게 정리한 집 전체와 새로 설치한 계단 중앙의 창문을 다시 하나하나 살피며 계단을 내려온 테디는 제 몫의 짐가방을 집어 든다. 그동안 또 무슨 일을 했더라? 다락에 있는 것들을 전부 치워버렸는데 거기에 뭐가 있었지? 테디는 제 기억의 공백을 천천히 짚어본다. 잊어버린 게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등에 작게 소름이 돋았다. 괜히 찬 바람도 불어오는 것 같고…. 기분 탓이겠지. 불안을 작게 숨기며 테디는 일 층의 긴 복도를 걷는다. 엄마와 아빠, 멜리사를 부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병원에 있다. 오늘 퇴원한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가족들은 전화상으로 상냥하고 다정하게 인사하였고, 테디도 그것이 좋았다. “고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테디가 조심스레 말했고 잠깐의 침묵 뒤에-테디는 그 옆에 있는 고모에게 바로 인사를 건네주나보다 싶었다.-돌아오는 고맙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차례의 인사가 오간 다음 전화는 끊겼는데, 테디는 가족들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초에 원래부터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가족들이라는 데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가 이상하다. 델핀 가족은 원래 다 그런 모양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가 새기는 각인은 그 무엇보다 강하므로.
테디는 마지막으로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쓰레기통의 문을 연다. 얼마 차 있지 않았지만, 갈기갈기 찢긴 택배 송장 뭉텅이가 있었다. 이걸 다 어디로 보내려던 걸까? 주소지조차 명확하지 않고 주워섬길 수 있는 단어라곤 델핀뿐이었는데, 이 집에 델핀이 아닌 자가 있다면 지금도 성명이 조안나 에르난데스인 고모가 유일했으므로 쓸데없는 추측은 않기로 한다. 테디는 괜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게 마음에 걸리니 쓰레기통 속의 봉투를 챙겨 끝을 단단히 동여매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마당을 성큼성큼 걷다가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리버풀의 에버턴, 그곳에 붉은 벽돌집이 있었다.
너른 마당을 끼고 있는, 체스터 형식을 개조한 집의 두 쪽짜리 현관문에는 문고리로 사자가 있었으나 그 사자는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 전인 듯 겁쟁이였고 문을 열면 펼쳐지는 복도를 비롯하여 거실의 마룻바닥 위에 두껍게 깔린 터키시 카펫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비명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좁다란 복도를 간격으로 나뉜 거실과 부엌은 그만큼의 거리와 벽을 두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람에겐 저마다 제 몫의 슬픔이 있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도 나눌 수 없는 슬픔은 스스로 끌어안아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시시껄렁한 TV 프로그램과 타인의 성취에 집중하며 상실을 달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무언가를 만들고 없애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슬픔을 치유한다. 계단 앞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여러 방은 차 있는 날 보다 비어있는 경우가 많고, 이따금 부부는 다른 방을 사용하며 타인이 달랠 수 없는 슬픔을 곱씹는다. 침입자는 제사장의 탈을 쓰고 왼쪽 끝 방의 신단에서 이룰 수 없는 기도를 읊지만, 동상이몽에 빠진 다른 가족들에게 그 문장이 또렷한 무게를 갖고 다가갈 날은 올 것 같지 않다.
난간 없는 계단을 뛰어오르면 카펫은 비명과 소음을 모두 잡아먹는다. 이따금 계단 위를 걷는 자의 다리까지 잡아먹으려 들 때도 있지만 집을 걷는 자가 집에 우호적이라면 집 또한 그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할 터다. 공간은 많은 것을 기억한다. 행복과 다정함도 그렇지만 적의와 슬픔을, 분노와 시기를, 좌절과 상실 또한 기억하고 있다. 뒷마당을 향해 나 있는 유리창은 들어서 밀기엔 너무 무겁고 언제 떨어져 깨질지 모르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이다. 그런 계단을 올라 2층에 닿으면, 터키시 카펫의 후임으로 자리한 옥스민스터 카펫이 마룻바닥의 비명과 함께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기억을 단단히 가둔 채 깔려있고 왼쪽 끝의 아이들 방을 시작으로 저마다의 추억을 지닌다. 왼쪽으로부터 두 번째 방은 비어있는 시간이 길었지만 언제나 그 형태를 잃지 않을 것이고,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 방은 그가 지닌 상실의 무게 만큼 자주 바뀌거나 혹은 이 이후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리라. 커튼의 색은 바꿔야 할 것이다. 상앗빛은 그 무엇을 지킬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멜리사가 금방 알아차리기를 바란다. 서재는 잠들어있다. 슬픔에서 도망치기 위해 작은 아이가 언젠가 번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은 그 아이를 잃음으로써 상기된 목적을 잃었으므로. 다른 누가 그 안의 장서를 들여다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내내 굳게 닫혀있으리라. 왼쪽 끝의 방은 언제나 창문이 열려있을 것이고 시계는 멈춰있을 터다. 그 누구도 방문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구의 위에는 두꺼운 모포가 덮여 가구들이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두겠지.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공간이 필요할 때, 집은 기꺼이 2층의 왼쪽 끝 방을 내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집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집에는 규칙이 있었고 어떤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다락에는 반드시 올라가지 말 것. 테디는 집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면서 중얼거렸다. 다락에는 그 무엇도 없지 않다. 오히려 모든 것들이 다락에 있다. 누군가가 숨겨놓은 비밀, 슬픔, 불안, 질투, 분노, 상실감, 좌절, 절망, 필요 충분의 애정, 집착, 열등감과 죄책감, 두려움과 공포, 의심과 불신, 맹목과 불친절, 편애와 상처 같은 것들이. 집을 이루는 사람들의 어두운 부분을 모두 끌어안았으며 집안의 모든 것을 느끼는 다락의 문도 열지 말 것. 만일 그 문을 열어 내부를 확인하게 된다면 분명 끔찍한 일을 당할 터다. 다락에 난 좁은 창문을 아무리 두드려봐도 규칙을 어긴 자를 구하러 올 사람은 없다. 다락은 비명과 울음마저 집어삼키게 되어있으니까.
라임스트리트역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 델핀은 자신이 부친 택배가 잘 가고 있을지 잠깐 걱정한다. 이 많은 화물을 다 옮기시겠다고요? 심지어 하나는……. 난처한 낯을 그리고 있던 택배사 직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몇 차례의 대화가 오간 뒤 무사히 배송이 이루어진다고 하였고, 어제까지 짐을 모조리 싸서 보냈으니 이제 도착할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방 두 개짜리 플랫이 꽉 차버릴지도 몰랐다. 가장 큰 짐은 집이 아닌 다른 자리로 옮겨주어야 했다.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그는 떠오르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중얼거린다. 그가 뒤로하는 리버풀의 에버턴에는 미스터 앤 미세스 델핀과 에르난데스 부인, 그리고 멜리사 델핀이 지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두 쪽짜리 현관문을 비스듬히 열며 시어도어 델핀을 부르던 가족들은 돌아오는 적막에 급하게 온 집안을 헤집어놓는다. 벽장에도, 방 안에도, 마루 밑바닥에도, 오븐 안에도, TV 속에도 테디는 없다. 테디의 방에 놓여있던 라디오만이 계속해서 노래를 뱉어낼 뿐이다.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내 마음을 너로 정했어……. 왼쪽 끝의 방까지 확인한 델핀 부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락의 문을 열고, 튼튼한 사다리를 올라 그 안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그가 비명을 지른다. 엘리엇이 떠났어. 엘리엇이 우릴 떠났어! 몇 시간 뒤 런던의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한 델핀은 미지의 대륙을 밟듯 들뜬 걸음을 내디딘다.
<끝>
▼
◆ 기본 안내사항
제목: 역할 바꾸기 놀이
장르: 고딕 호러
전체 분량: 95,068자
작업 기간: 20220502~20220524
개요: 마흔두 살의 테디 델핀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족과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상한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인가?
자작캐릭터 시어도어 "테디" 델핀 개인만족용 고딕호러 로그입니다. 본편을 한번에 올리기는 너무 길어서 분할해 올립니다. 편하게 읽어주세요. 각 편마다의 후기는 밑에 ▼
7. 그리고 남은 사람은 후기
7편의 플레이 리스트이자 이 글의 엔딩곡은 조지 해리슨의 Got my mind set on you 입니다. 그래서 나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집에서 배 긁으며 놀고 있는 오리지널 테디는 위기감을 느껴서 운동하러 바깥으로 나갔다네요. 즐겁게 읽어주셨을까요? 제가 쓰면서 즐거웠고 힘들었던 만큼 읽는 시간이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본래 규격대로 읽고 싶으면? 포스타입에서 읽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