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문※
차원 이동 사업은 빠른 속도로 눈부신 발전과정을 보인 전무후무한 사업이며 고갈되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넘쳐흐르나, 이익이 많은 만큼 위험과 불안요소도 다수 존재하는 사업임을 인정하자. 눈앞에 보이는, 혹은 배후를 노리는 위험을 외면하는 것은 결단코 현명한 사업가의 자세라 할 수 없으며, 이익은커녕 수많은 손해를 야기할 수도 있으니 가장 중요한 태도는 자신의 주변에 도사리는 위험을 인정하고 늘 긴장한 채로 사업에 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에 대해, 저자 일동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고 단언할 수 있다. “차원이동 중 조난에 휘말렸을 시의 대처 방안 매뉴얼”은 신사의 재킷 안주머니에 딱 알맞게 들어가는 핸드북 크기로 출판될 것이며, 차원을 이동하며 사업을 하는 이들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으로 지정될 것이다. 모두 이 매뉴얼을 외우고 실생활에 응용하여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준비된 사업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길 바란다.
이 매뉴얼은 목차의 제목으로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순서를 설명한 뒤 각 장에서 사례와 함께 그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놓치면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 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러니 이 작은 핸드북조차 읽을 시간이 없는 성공한 사업가는 목차만을 읽어도 괜찮을 것이라 본다.
그럼, 모두에게 차원의 축복과 엄청난 이익이 기다리길. 위험에 대비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지만,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은 위험을 마주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개인의 보람과 기업의 성장,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그대들의 노동을 찬사하는 것으로 서문을 마친다.
P.S. 뒤의 모든 항목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침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경고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이 앞에 적어 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적어둔다. : 모든 차원의 수에는 한계가 없고 모든 차원은 저마다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어떠한 차원에 대하여 편견을 갖지 말라. 편견은 모든 것을 좀먹고 일을 어렵게 만들 뿐임을 기억하라. 편견과 싸워온 역사를 기억하며 다른 차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1.주변의 달력과 시계를 통해 시대, 날짜, 시간을 찾아라.
'지금이 몇 시지?' 부장은 눈을 뜨며 생각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기도 했다. 부장은 질문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에 플래시가 터지듯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고,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파오며, 현기증에 몸이 고꾸라지고 온몸에 한기가 뻗쳤지만 질문을 거둬들일 수는 없었다. '지금이 몇 시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연거푸 가쁜 한숨을 내뱉다가, 숨을 잘못 들이쉬어 매운 기침을 연신 내뱉는 와중에도 그는 궁금해 했다. '지금이 몇 시지?' 숨이 막히고 몸이 뒤로 넘어가 딱딱한 구시대 매트리스와 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베개에 부딪히면서, 천장의 패턴이 만화경처럼 벌어졌다가 모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생각한다. '지금이 몇 시지?'
"지금이 몇 시지?"
겨우, 말이 나왔다. 힘겹게 빠져나온 단어와 문장은 곧 다시 기침에 사로잡혀 그는 발작하듯 몸을 떤다. 질문을 내뱉고 나니 외면하고 있던 모든 증상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말 그대로 해일 같이, 커다란 파도로 자신의 몸을 때리고 집어삼키려는 듯. 부장은 제발 물이 담긴 컵이 주변에 있기를 바라며 손을 뻗었고, 마침 컵의 손잡이 부분이 손끝에 닿아 조심조심 컵을 들었다. 물이 담겨 있는 것을 알리듯 기분 좋은 무게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컵을 입에 가져가, 천천히 마시고 나면 그 모든 증상들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는 다시금 질문했다. '지금이 몇 시지?' 자신이 몸을 일으킬 여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지금은 누군가 시간과 날짜를 제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전 11시 17분이오. 당신이 처음 질문했을 때로부터 7분이 지났지."
순간, 부장의 숨이 멎는다. 낯선 목소리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는 목소리가 적대감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저울질하며 다시 숨을 내쉰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눈앞의 사람이 괴로워하는 데도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던 것을 보면 아마 냉혈한이리라. 부장은 눈알만 굴려 그를 찾으려 한다. 마침 신문 접는 소리가 들리고, 실크와 벨벳이 부드럽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린 뒤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드럽게 컬이 들어간 머리칼을 전부 뒤로 넘긴 미남자는 지친 표정으로 부장을 내려다보며 굵은 테 안경을 벗고 제 조끼의 가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회색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부장은 몇 가지 더 질문이 있다는 듯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입을 벌린다. 잠시 숨이 가빠 말을 할 수 없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전부가 아니야. 지금은 어떤 시대지? 날짜는?' 부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생각하는 것이다.
"5일 만에 깨어나셨군. 예수보다는 오래 걸렸어. 당신이 잠들어있는 동안 벌써 6월이 되었다오. 6월 1일의 정오의 햇살을 보여주고 싶지만 몸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군. 1960년대의 첫 번째 6월인데 말이야. 안타깝게 됐지. “
남자는 가볍게 미소를 그리며 부장의 질문에 답하듯 말했다. 어쩌면 시를 읊는 것도 같았다. 부장은 당황하여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리 내 웃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털썩 걸터앉는 소리가 들렸다.
"1960년이라니, 놀랍지 않소? 우리는 1960년이라는 것이 오지 않을 줄 알고 인생을 살았지. 미래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모두가 두려워했소. 혹시 모를 희망을 품는 이들도 있었지만, 늘 희망보단 절망이, 두려움이 큰 법이니까. “
아까의 무심한 목소리는 긴장이 풀린 듯 조금 부드러워져있다. 유려한 발음, 고풍스러운 어투로 말하던 그는 의자의 나무 손잡이를 손톱으로 두드리며(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장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부장은 겨우 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몸이 많이 아프신가보군. 그러고 보니 그럴 만도 했소. 우리 집 앞에서 쓰러져 계셨으니. 내 아내가 당신을 발견하고 집에 들이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마 얼어서 죽었을 거요. 아내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길 바라오. 우선은 몸부터 회복하여야겠군. 아픈 이를 상대로 계속 말을 걸 수는 없으니 나는 이제 자리를 비우겠소."
말하며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부장은 다시 미남자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더 알아둘 것이 있다. 부장은 겨우겨우 단어와 단어를 잇는 데에 성공하여, 질문을 내뱉는다.
"당신은, 누구고.. 여긴 어디지?"
그의 질문에 남자는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윽고 가벼운 미소를 짓고는, 매력적인 얼굴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려보낸다.
"당신은 지금 낭만의 시대 한 복판에 와있지. 이곳은 나의 연구실이자 성이자 저택이고, 나는 이 성의 주인인 박사요."
그럼, 잠시 뒤에 뵙겠소. 작별인사를 건네며 박사는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갔다.
2.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라.(물리적인 위치는 물론 사회적인 위치까지 파악하라.)
※지나치게 많은 차원 이동이 야기하는 증상(이하 차원이동반작용)※
1. 두통과 현기증, 호흡곤란.
2. 피로와 무기력증.
3. 과대망상과 불안증.
4. 착각과 기억의 혼란.
※이중 한 가지 증상이라도 보인다면 당장 차원 이동을 멈추고 휴식과 안정을 취할 것.※
"정확한 게 필요해." 부장은 중얼거렸다. 몇 번 더 기침을 하고, 두어 번 정도 물을 마셔 물 컵을 비운 뒤에야 논리 정연한 생각을 꾸려갈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다짐하듯 자신에게 중얼거릴 여력 또한 생겨났다. "정확한 게 필요해." 그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말을 마치고 나면 입을 꾹 다문다. 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시간과 년도, 날짜는 물론 시대까지('낭만의 시대'가 아니었던 시절이 있기는 했나 싶지만, 아무튼. 부장이 의지할 것은 지금 이런 단서들뿐이었다.) 부장에게 알려주었다. 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가 제시한 단서들을 그러모아 정리한다면, 부장은 현재 1960년의 6월 1일, 낭만의 시대라 불리는 차원에 와있다. 정확하게는 차원이동 도중 조난을 당해 그 차원에 떨어졌다. 누워있는 곳은 박사의 성 안의 낡은 침대. 정확한 것은 그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정확할까?' 부장은 반문했다. ‘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인가?’ 차원이동 중 조난을 당하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둬야 한다. 탈출 계획을 설계하거나 구조 요청을 보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치상으로 존재하는 년도와 날짜, 시간은 물론 사람들이 인식하는 시대상까지. 또한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이 어디인지, 지구 차원인지 외계 차원인지도 정확하게 밝혀내는 것이 우선이다. ‘정확한 게 필요해.’ 부장은 다시 생각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는 것도 버거웠으나, 부장은 얼른 정보를 수집하고 탈출 계획을 짜거나 구조 요청을 보낼 의욕으로 가득했다. ‘의욕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차원이동반작용은 없군.’ 부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피로와 무기력증은 차원이동반작용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최근 이 증상으로 인해 수많은 차원이동 사업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여 차원이동 관리부에선 사업가들의 차원이동량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확히는, 그런 과정에 있었다. 기업의 반박이 거세지는 와중에 차원이동 도중 조난을 당했으니 결국 어떻게 됐는지는 부장도 모른다. 지금 와서는 신경 쓸 문제도 아니다.
부장은 숨을 고르며 박사에 대해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그와의 대화는 짧았고, 어쩌면 일방적이었지만 필요한 정보의 대부분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이 정확한지는 증명되지 않았지만―증명을 위해서는 박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생면부지의 타인이 눈을 뜨자마자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품어보기로 했다. 부장은 박사가 필요했다. 그가 자신을 이 끔찍한 조난상황에서 빠져나갈 탈출구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허나 지금 방에는 부장뿐이었고, 박사가 언제 이 방으로 들어와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될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장은 박사에 대한 인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이름은 불명. 나이 불명. 스스로를 박사라 칭한 것을 보면 과학에 관심이 많은 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전부 뒤로 넘긴 미남자이며,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눈동자는 무심해보이나 가끔 빛을 내면 부드럽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가만.
“무슨 색이었더라?” 부장은 소리 내 묻는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모르니까.
그제야 부장은 주변을 돌아본다. 지금까지 내적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했기에 간과한 사실이 있다. 주변의 물건들,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는 물론 가구들과 물 컵,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은 물론 조명의 불빛까지, 창문 바깥의 구름과 태양빛도. 전부 색이 없다. 흑백이었다.
그리고 부장의 손도… 회색빛이었다. 박사의 눈 색과 머리카락의 색을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 이 세계는 모든 것이 흑백인 차원이니까! 부장은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정확한 것이 하나는 생겼군.’ 부장은 박사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색을 잃은 흑백의 차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점심 식사 하시게. 오, 깨어있었군.”
부장이 의문을 갖는 것과 동시에 박사가 반쯤 열린 방의 문을 밀고 들어온다. 한 손에는 간단한 점심이 담긴 은 쟁반을 들고 있는 채였다. 물론 흑백이었다.
“오늘은 빵이 잘 구워졌어. 아주 노릇노릇한 빛깔이지. 다시 침이 고이는군.”
태평한 말투로 말하며 박사는 그의 무릎에 쟁반을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해맑은 표정, 모든 것이 익숙하다는 그 얼굴을 보고 부장은 생각했다.
‘모르는구먼.’
3. 자신의 소지품을 확인하라. 분실물이 있는가?
(다른 어떤 일이 있어도 휴대용 차원이동장치와 차원이동 중 조난에 휘말렸을 시의 대처 방안 매뉴얼은 분실해선 안 된다!)
“제가 5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셨나요?”
“정확히는 4일 하고 스물 몇 시간이겠지만. 날짜로만 따진다면 그렇소.” 답하는 박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부장은 잘 구워진 회색 빵에 조금 더 밝은 회색 버터를 바르며 그의 답을 듣는다. 이런 상황에 먹을 게 그래도 넘어가긴 넘어가는구나.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안락의자에 편히 기대 앉아 시커먼 커피(커피향이 나는 것을 보니 아마 그럴 것이다)를 홀짝이며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다른 차원에서 온 낯선 이를 방에 두고도 말이다. 물론 박사는 부장이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체를 모르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은 여전했다. 부장은 빵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 퍼지는 빵과 버터의 맛에 잠시 감탄한다. 그러곤 조금 멈칫하더니 빠른 움직임으로 빵을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많이 허기지시겠군. 더 필요하면 말씀하시오. 내 더 준비하라고 밑에 일러둘 테니.”
부장이 게걸스레 빵을 뜯어먹는 모습을 보며 박사는 커피가 담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저 남자가 내려가면 또 언제 올라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장은 고개를 급히 젓는다.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한 동안 굶었더니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군요.”
그 말에 박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부장을 보고, 그 시선을 마주하자 부장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문다. 그렇게 맛있게 먹어놓고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부장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사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든, 필요한 게 있다면 이야기 해 주시오. 오랜만의 손님이고, 우린 최대한 극진히 대접해드리고 싶으니까.”
배려가 가득 담긴 말이었다. 부장은 고맙다며 침대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보였다. (아쉽긴 하지만 지금의 부장으로선 그게 최선의 감사 표현 방법이었다.) 박사는 됐다며 손을 저어보이곤 어깨를 잠깐 떨며 부장을 바라봤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선, 무언가를 탐구하는 자의 눈빛. 이전에도 몇 번 마주했던 그 눈빛에 부장은 잠깐 암담한 기분이 되었다. 드디어, 박사가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이를 속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부장은 어쩔 수 없이 늘 자신을 구해주었던 대처방법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저, 갑작스레 이런 말을 하면 당황스러워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소. 뭐든 말해보시오.”
박사의 사람 좋은 대답에 부장은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혹시 쓰러진 저를 발견하셨을 때의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박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열에 아홉은 당황하는 법이다. 박사가 그 열중 아홉에 해당하는 인물이어서 다행이었다. 박사는 잠시 제 턱을 매만지며 숨을 내쉬고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곧 입을 열었다.
“산책을 나간 아내의 비명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지.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아내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하는 거요. 그것도 뛰어난 도둑마저 침입하기 힘든 아내의 정원에서. 급히 뛰쳐나와 확인해보니 당신이 있었지. 당신의 가방에서는 내용물이 빠져나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잠깐.”
‘내가 가방을 왜 잊고 있었지?’ 부장은 깊이 탄식했다. 소지품. 소지품을 찾았어야 한다. 매뉴얼에도 적혀 있던 것을 왜 잊었을까. 부장은 단호하게 말하는 것으로 박사의 말을 끊어놓고선 급히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제가 가방을.. 갖고 있었다고요?”
“훔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것이었겠지요.”
훔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훔치다시피 강요하여 따낸 계약 내용이 적힌 문서가 가방 안에 있긴 했지만, 훔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가방 안의 내용물은 모두 부장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었고, 가방만 되찾는다면 이 상황에서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방, 가방, 가방. 가방. 가방을 찾아야 한다. 부장은 조금 다급하게 박사를 바라봤다.
“지금 제 가방을 볼 수 있을까요? 가방을 본다면 기억이 다시 떠오를지도 모르니까요.”
박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검지로 제 이마를 긁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는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아내가 가방을 갖고 있을 거요. 내 아내에게 가서 가방을 받아오리다.” 부장은 고맙다며 박사의 등에 손을 흔들었다. ‘오면서 빵도 더 가져오면 좋을 텐데.’ 부장은 이뤄지지 않을 바람을 하나 품고는 흔들던 손을 내린다. 박사는 문을 빠져나가기 전 슬쩍 뒤를 돌아 부장에게 기분 좋게 웃어 보인다.
“그리고 내 손님에게 필요한 빵도 더 가져와 드리지.”
박사가 방을 나간 뒤 부장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허, 하며 웃어버린다. 일이 잘 풀리는군. 부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회색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뿐이다.
3-1.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두 물건 중 하나라도, 혹은―최악의 경우이지만―둘 모두를 잃었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패닉에 빠지지 말라. 늘 침착함을 유지하라.
좆 됐네. 가방을 확인한 부장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가방의 내용물은 두 가지를 제외하면 완벽하게 제 자리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물건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부장은 그나마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 휴대용 차원이동장치와 차원이동 중 조난에 휘말렸을 시의 대처 방안 매뉴얼, 그 두 가지만 제자리에 있었더라면. 운명의 장난인지 그게 아니면 누군가 고의적으로 훔쳐간 것인지 딱 그 두 가지만 없다.
휴대용 차원이동장치는 가장 빠르고 쉽게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수단이다.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말짱 꽝이긴 하지만, 아주 적은 양의 전기로도 충분히 제 할 일을 해내니 크게 걱정되는 점은 아니다.
차원이동 중 조난에 휘말렸을 시의 대처 방안 매뉴얼은 부장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자신의 안전을 유지하고, 탈출 방안을 세울 수 있는지 길안내를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휴대용 차원이동장치가 있다면 큰 역할을 하지는 않겠지만, 만약 이동장치가 없다면 매뉴얼의 세부적인 안내사항에 따라 차원 통로를 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는 것이 현실이다. “좆 됐어….” 다시 한 번, 부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눈앞이 깜깜하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가 않는다. 부장은 크게 한숨을 쉬고, 그대로 풀썩 드러눕는다.
“…괜찮소?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군. 뭐 없어진 물건이라도 있는 건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박사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암담했다. 박사가 ‘좆 됐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이 차원에도 이런 말이 있나? 부장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슬쩍 눈동자를 굴려 박사를 바라본다. 아니나 다를까, 박사는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손에는 구워진 빵이 놓인 은 접시를 든 채였다.
“빵은 더 드실 수 있겠는가?”
박사는 조심스레 물었고,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침착하자. 이런 상황에서 당황해서는 안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음에도 여전히 배가 고픈 것 또한 한 몫 했다. 우선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다.
손님의 식사장면을 마냥 보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박사는 방을 떠났다. 부장은 입 안에 있는 빵을 마저 씹어 삼킨 뒤에 크게 한숨을 내쉰다. ‘이젠 어떻게 하지?’ 생각을 해내야 했다. 답을 도출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결정을 내려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부장은 흑백의 방 안을 눈으로 샅샅이 살피며 고민을 거듭했다. 이윽고 답을 내린 듯, 그는 빵이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고는 남은 빵을 전부 입에 밀어 넣어 우걱우걱 씹는다. 접시를 비운 뒤 손등으로 입가의 빵가루를 훔쳐내고 바닥에 털어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바닥을 밟아 발에 힘을 싣는다. 닷새를 누워 있던 몸이다. 박사의 말에 의하면, 어쩌면 자신은 차원 조난을 당했을 시 추락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몸의 일부분이 부러지거나 다쳤을 수도 있다. 부장은 잔뜩 긴장한 채 침대 위에 얹어져 있던 제 엉덩이를 들어올린다. 잠시 휘청하는 감각을 지나고 나면, 자연스레 탄성이 나온다.
‘적어도 일어설 수는 있네.’
그러나 걷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부장은 한숨을 푹푹 쉬며 바닥을 걸었다. 벌써 숨이 차고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이 정말 크게 좆 됐구나 싶다. 아마도 양모일, 이 부드러운 바닥이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뜨거운 불에 달궈진 불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 말하며 계속 걷는 부장은 제 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잊기 위해 계속해서 생각한다. 사용인에게 부탁하여 박사를 부르자. 박사가 오면 그의 아내를 보고 싶다고 하고. 그의 아내와 만나면 자신의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분명 매뉴얼에 적힌 사안을 어기는 일이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장에겐 자신이 있던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 가장 급하고 큰 목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매뉴얼의 다음 항목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한 몫 했지만, 괜한 불안감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점은 애써 무시했다. 천근같은 걸음을 이어나가 문고리를 붙잡으면 그것을 비틀어 열며 부장의 몸도 비틀린다. 정확하게는, 휘청 인다.
“어머나! 괜찮으신가요?”
사용인이 놀라 그의 몸을 부축하면 부장은 낮게 한숨을 쉰다. 그래도 완전히 좆 된 건 아닌 모양이지. 부장은 속으로 생각한다. 사용인이 올 때까지 복도에 쓰러져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부장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땀으로 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다. 흑백의 사용인을 가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회색의 하늘이었다.
“이 집의 주인 분을 좀 불러주시겠어요? 부탁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부르면 알아들을까. 제발 알아들어라. 부장은 간절히 기도했고 사용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알아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박사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냥 박사라고 부르면 되는 구나.’ 부장은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를 부르러 가기 전에, 사용인은 눕혀드리겠다며 지친 부장을 부축한다. 감사 인사를 건네며 방으로 돌아가면서, 부장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창밖을 본다. 먹구름 밑으로는 커다란 저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는 가운데, 새카맣고 거대한 성이 그 끝에 서있었다. 그 성의 주변에서 번쩍 하고 천둥이 내려침과 함께, 문이 닫힌다.
✂ 컷! ✂
-길이 문제로 두 편으로 나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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